수색

<레베카 스톤> 16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2부



그들은 또다시 투명한 피라미드를 거쳐 루브르에 들어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미술관 뱃속으로 들어가며 모나는 판유리 너머 11월의 무거운 구름과 유리 표면에서 찰박이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이는 광대한 폭포를 떠올렸다. 물줄기를 지나면 나오는 동굴을 통해 비밀과 불안이 가득한 깊은 곳으로 이어지는 폭포.

-토마 슐레세, <모나의 눈>



(파리, 2017년 8월)


여름 계절학기도 끝난 8월이었다. 줄리앙이나 다른 학생들이 학교에 있을리는 없었지만 행정실을 통해 사물함 열쇠를 받기로 해두었다. 보호자인 마르셀이 모르는 줄리앙의 사생활이 있다면 학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셀은 생 오노레 학교 맞은 편에 있는 카페 앞에서 제이미를 불렀다.


“제이미, 아침 못 먹었지?”


눈 뜨자마자 줄리앙부터 확인한 마르셀이 메러디스 할머니에게 바로 연락을 해두었다. 할머니는 뒷정리를 제시카에게 맡기고 헨리크와 제이미를 깨워서 달려왔다. 마르셀의 집에 모여서 줄리앙의 흔적을 이 잡듯이 뒤지는 동안 해가 떴고 마르셀은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다가 수업시간이 임박했음을 떠올렸다. 줄리앙이 데려와야 하는 아이들은 제시카를 통해 상황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폴이었다.


“조르주, 벌써 오셨어요?”


바람을 쐴 겸 진입로에 나가서 전화를 하려던 마르셀은 조르주의 차를 보고 달려가 손짓했다.


“왜 나와 계세요?“

”줄리앙이 갑자기 안 보여서 제가 수업을 당분간 못 할 것 같아요. 별일 아닐수도 있는데 왠지 느낌이…“

”저희는 일단 돌아갈게요. 아이 맡기고 저도 출근해야해서.“

”네.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조르주를 돌려보내느라 폴에게는 인사도 못했다. 메러디스와 헤어져 학교 근처에 와서야 그 생각이 났다. 옆에 있는 제이미는 또 무슨 죄인가.


”여기 샌드위치 맛있어. 먹고 싶은 걸로 골라봐.“


마르셀은 제이미가 고른 샌드위치와 커피 두 잔을 시켰다. 제이미가 식사를 하는 동안 커피를 마시면서 긴장이 풀린 마르셀은 다시 걱정에 압도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줄리앙의 소재에 몰입해서 수업시간에 아이들을 휴강시켜야하는 압박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갑자기 아이들과 보호자들에게 자신의 비밀이 알려질 위기해 처했다는 것까지 깨달았다. 그런데 줄리앙이 애들이랑 친했나?


”선생님은 안 드셔도 돼요?“


샌드위치를 거의 다 먹은 제이미가 이제야 묻는다.


”난 아직 못 먹겠어. 미안하다. 진작 사줄걸.“

”저도 입맛은 없는데 힘을 내야 수색하죠.“


제이미는 마르셀에게 묘한 편안함을 느꼈다. 뭘까, 이 느낌은. 헨리크와 비슷하다. 헨리크는 잘 하고 있겠지? 근데 왜 헨리크는 제이미를 보면 안쓰러운 표정을 지을까. 제이미는 마르셀을 보면서 둘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붙임성이 좋은 헨리크,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부끄러움을 타는 마르셀. 공통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일까?


마르셀은 줄리앙의 노트북에 접속하지 못해서 자신의 폰으로도 볼 수 있는 줄리앙의 공개 친구명단을 캡쳐했다. 이 중에서 학교에 있는 줄리앙의 사물함이나 줄리앙의 흔적이 남은 전시물 등과 관련이 있는 이름을 추려야 했다. 줄리앙의 친구가 많지는 않지만 소셜미디어 친구에게 다짜고짜 줄리앙의 안부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넌 학교 친구들이랑 소셜미디어 공유하니?“


어쩌면 교집합이 아주 협소할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서 제이미에게 묻는다.


”저는 홈스쿨링해요.“


아, 맞다. 마르셀은 미나에게 받은 학생소개를 떠올렸으나 질문을 돌이키기엔 늦었다.


”선생님하고 잘 맞으면 파리에서 살까 했어요.“


제이미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마르셀보다는 줄리앙이 그녀의 목적이었지만 왠지 그걸 드러내면 줄리앙에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차라리 무심한 척하기로 했다.


마르셀과 제이미는 줄리앙의 사물함 앞에서 서로가 모르게 심호흡을 했다.




메러디스는 개선문 근처에 대충 주차하고 맥마흔 극장 앞으로 갔다. 여기부터 시계방향으로 탐문할 생각이었다. 로비에 들어서자 갓 튀긴 팝콘 냄새가 났다. 메러디스는 아이들에게 아침 식사를 챙겨주지 못했다는 걸 깨닫고 어지럼증을 느꼈다. 부모와 떨어져서 자신의 집에 머물고 있는 헨리크와 영국 자매들만큼은 친손주처럼 생각한다 자부했는데 줄리앙도 소중했던 것이다. 메러디스를 믿고 하숙을 소개한 미나에게도 미안함이 몰려왔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


헨리크는 초초했다. 제이미는 마르셀과 있기에 관련정보를 바로바로 업데이트할 것이다. 제이미와 경쟁 관계는 아니지만 왠지 부아가 났다. 마야나 조르주처럼 미나와 가까운 사람이 보호자인 베키와 폴조차 헨리크 본인보다는 정보력에서 우위에 있는 것 같다. 메러디스 할머니 역시 대부분의 정보를 바로 입수하는데다 연륜이 있으시지만 젊은 보호자들의 신속함과는 다른 느낌이 드는 걸 막기 힘들었다.


“아프시면 저기 좀 앉아계세요. 제가 물어볼게요.”

“아니야. 난 괜찮아.”

“먼저 집으로 가셔도 돼요.”

“괜찮다니까! 우리 나가서 식사부터 하자.”

“배 안고파요.”

“하루종일 다녀야 할수도 있어. 먹고 시작해.”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나가자고요?”

“식당은 널렸어. 여긴 우리동네랑 다르잖니.“


메러디스는 로비를 등지고 밖으로 한 발 내딛으려 했다. 헨리크는 머뭇거리다 빨리 먹고 돌아오겠다고 마음을 고쳐먹고 앞장섰다. 그들은 옆 건물 테라스에서 빵과 스프, 커피를 주문했다.


“어느 극장인지는 모른대요?”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헨리크는 줄리앙 생각 뿐이다. 줄리앙이 제이미보다도 자신에게 더 무심했던 걸 알지만 헨리크는 줄리앙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가 누구와 함께여도 볼 수만 있다면 감당할 수 있는데.


“극장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친구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 마르셀이 물어봐도 어느 극장의 누구인지는 대답하지 않는대. 마르셀한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는 친구인가봐.”


보안이 철저한 관계. 줄리앙과 마르셀도 겉보기완 다르지만 이들의 공식적인 관계와 달리, 연결고리가 아예 없는 관계일수도 있다. 헨리크는 줄리앙이 다른 사람과 있는 장면을 상상했다. 헨리크가 사소한 관심을 표해도 고맙다고 말하고 쌩하니 가버리는 줄리앙. 제이미가 시선을 피하면 바람둥이처럼 장난을 치는데 정작 그에게 무덤덤한 소녀들에게는 그저 친절한 줄리앙. 곁을 주지 않는 줄리앙.


헨리크가 베키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것처럼, 줄리앙도 누군가에게 그럴 것이다. 이 극장이 아니라면 다음 극장, 그곳도 아니라면 그 다음 극장에 그 사람이 있다. 줄리앙의 베키가 있을 것이다.




베키는 폴의 설명을 들으면서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과 전시실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분명 이 방으로 이끄는 무언가를 느꼈다. 폴은 여기에 ‘와야 한다’고 했다. 제안이 아니라 과제였다.


-파리는 어때? 재미있어?

-남친이랑 미술관이야


작은 고모에게 온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을 입력하는 베키의 입모양을 보고 있던 폴의 얼굴이 붉어졌다. 입력을 마치고 고개를 든 베키도 폴의 얼굴을 보자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내가 남친이야?”


베키는 말없이 폴의 손을 잡았다. 폴의 뒤에서 조르주가 오고 있었다. 아직 발그레한 베키는 조르주의 반대방향을 향해 걸으면서 폴의 손을 이끌었다. 전시실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 폴을 끌고간 베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고 폴은 그녀를 감싸안은 자세로 충격을 흡수했다.


“여기 이 벽은 색깔이 조금 다른데?”

“그러게. 원래 안 그랬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던 조르주가 벽을 살짝 밀어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벽과 벽이 만나는 곳에 살짝 갈라진 틈이 있었지만 조르주의 손이 들어갈 만큼 넓지 않았다.


“제가 해볼게요.”


베키는 폴의 손을 잡지 않은 오른손을 벽틈에 넣었다. 미술관을 가로지르는 동안 폴보다 주먹 하나는 더 커져버린 키와 다르게 손은 아직 덜 자랐는지 쏙 들어갔다. 틈새에 손이 빨려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베키는 틈새를 천천히 당겼다. 벽틈에서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어둠이 새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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