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스톤> 17화
(전편에서 이어짐)
벤은 이제 엄마에게도 곧잘 안겼다. 배리가 태어날 때까지 5년 가까이 외동이자 막내였지만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베키, 첫돌이 되기도 전에 벤이 태어나서 막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배리와 달리 6년 내내 막내였고 앞으로도 영원히 엄마에게만큼은 막내일 벤. 아이가 없는 큰 고모 소피 부부와 싱글인 작은 고모 시에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벤.
무엇보다도 누나인 베키의 최애이자 자랑거리였던 벤은 오랜만에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래도 누나가 보이면 엄마를 등지고 달려갔다. 마야는 베키를 보면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그러나 아직 아기인 벤을 보면 자신이 세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이 너무도 확실해져서 조금 슬펐다.
“우리 이제 학원 안 가요?”
배리는 이제 모든 걸 엄마에게 묻기로 한다. 누나는 이미 떠났다. 누나는 계속 누나이고, 저녁때 집에 올 것이며 아침에 동생들을 깨우러 오겠지만 예전처럼 데리러 오거나 모든 일정을 함께 수행하지 않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배리는 이제 누나가 초등학생보다는 어른에 가깝다는 걸 안다. 물론 누나는 중학생이 되는 거라고 했다. 중학생이 할 수 있는 것 중에 누나가 안 해본 건 없을 것 같았다. 우리 누나는 다 잘할 거야.
“마르셀 선생님이 다시 수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너희는 프랑스어 재미있니?”
마야는 교육보다 돌봄의 목적이 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묻는 지금도 아이들이 프랑스어를 얼마나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난 노르웨이어가 더 좋아!”
벤이 먼저 대답했다. 노르웨이에서 헨리크를 만난 이후 벤의 두 번째 언어는 노르웨이어가 됐다. 형들과 보내는 시간이 즐거웠기에 프랑스어에 대한 부담은 없었다. 다만 벤이 아는 프랑스인은 마르셀과 줄리앙, 메러디스, 메리뿐이다. 폴은 프랑스 국적도 있지만 프랑스어 수업을 같이 듣고 있는 미국인에 가까웠고 동생들은 물론 베키에게도 언어적 장벽은 거의 없었다.
“프랑스어 어려워요. 누나는 프랑스어도 잘하는데.“
마야는 미나를 통해서 알게 된 프랑스인 저널리스트나 작가들과 영어나 스페인어로 소통했다. 마야 역시 프랑스어는 어려웠고, 사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아이들이 프랑스인 친구를 거의 만나지 못했다면 프랑스어 수업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영어로만 대화할 것이다. 헨리크와 두 아들을 미술 수업에 보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미술 선생님 알아볼까? 너희들 파리가 어떤 곳인지는 아니?“
”누나는 지금도 미술관에 있잖아요”
“그래. 너희는 아직 뛰어노는 게 좋았잖아.”
“벤이랑 놀아줘야 하니까요. 전 미술관 좋아요.”
당장은 헨리크도 없다. 마야는 벤을 데리고 다닐 생각에 걱정스러운 한편 배리에게도 파리를 충분히 보여주고 싶었다. 베키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그런데 베키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미국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거겠지?
미나는 저 멀리 달려가는 아이를 따라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숨이 찼다. 낮은 뜨거웠고 온통 초록이었다. 여름의 향기. 그리고 익숙한 시골의 향기. 프랑스 남부인가? 파리 근방은 이렇게 덥지 않았다. 여긴 마르그리트의 별장이 있는 마을과 닮았지만 훨씬 생명력이 넘쳤다. 조르주의 본가가 있는 이탈리아일지도 모르겠다. 저 아이는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이곳이 어디인지 알아내려면 저 아이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더는 못 뛰겠다는 생각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아이는 길이 갈라진 곳에서 과수원 쪽으로 방향을 틀며 속도를 낮추었다. 발밑이 푹신해졌다. 아이를 주시하는 동안 미나도 과일나무 사이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베키는 이제 10미터 앞에 있었다. 베키였구나. 키가 너무 자라서 못 알아봤네.
아이라고 생각했던 소녀에게 다가갈 때마다 소녀는 성장했다. 이제 5미터 앞. 저 아이는 어지간한 성인 여성보다도 크고 성숙했다. 모퉁이를 돌자 다른 소녀들이 과일을 따고 있었다. 베키가 합류했다. 분명 베키가 아닌데도 베키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소녀가 미나를 보고 손짓했다. 미나가 따라오고 있었다는 걸 아는 눈치다.
“여기가 너의 포털이구나.”
프랑스어로 대화했을 법한 상황이었으나 미나는 영어로 말했다. 영어로 말하느라 말이 느려졌고 생각의 틈이 벌어졌다. 꿈이었구나. 그곳이 베키의 포털인 건 사실이었다. 단지 그동안 미나가 드나들던 포털과 전혀 다른 곳이라 해석이 필요했다. 신들의 만찬을 구경하려면 개선문이나 광화문처럼 상징적인 장소에서 접속해야 한다. 모든 영매가 모든 문에 접속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영매는 묘지 근처에서 접속할 수 있다.
미나는 파리에 있는 서울공원에서 접속할 때 가장 신통했다. 그러나 지금 미나는 서울 본가에 있다. 베키의 포털은 시골의 과수원인가? 아닐 것이다. 분명 저 과수원을 둘러싼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베키만 드나들 수 있는 문. 그것이 베키의 포털이다. 그곳에 접속하면 베키는 알고 싶은 것을 알아낼 것이다.
미나의 서점에 VIP 서가가 있다. 그걸 메리가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메리와 아무리 친해졌다 해도 기밀을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섣불리 떠보다 미나의 귀에 들어가면 다시는 서점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것이다. 하나뿐인 아들까지 미나 집에 놓고 와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르네는 속이 탔다.
“저 고양이는 어디 살아?”
“저도 몰라요. 얼마 전에 갑자기 나타나더니 자주 오네요. 여기가 좋은가 봐요.”
“오래된 단골은 아닌가 보네.”
오늘따라 메리도 심드렁했다. 어제 할머니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출근했다더니, 얼굴이 푸석하다. 메러디스와 헨리크 등이 마르셀의 집에 모여있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폴, 베키 픽업했어. 줄리앙 찾으러 갈 거야.
마르셀을 챙겨주기로 한건 르네인데 폴과 베키까지 수색에 참여한 이 시점까지도 르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조르주가 마르셀의 집에 이미 다녀왔고 폴은 베키에게 데려다줬다. 폴을 데리고 다녀봐야 접근성이 좋아질 리가 없다. 파리에 미나가 없어도 파리는 미나의 구역이고 미나의 지인들에게 르네는 반갑지 않은 사람이다. 그들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이 르네와 베키가 함께 있는 거겠지. 르네는 베키와 간신히 얼굴만 트고 물러났다. 염탐이 가능한 건 메리뿐인데 메리는 문지기에 불과하며 권한이 없었다.
“네, 할머니. 저는 별일 없어요.”
메러디스도 줄리앙을 찾고 있다고 알려왔다. 들어놓고도 메리는 르네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다. 미나가 르네에게 마르셀을 부탁할 때 메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대신 줄리앙은 죽은 마르그리트의 후계자이니 아직 각성하기 전이라 해도 조심하라고 했다. 파계 수녀 마르그리트가 입양한 알제리 소년. 그에게 무슨 능력이 있기에 굳이 조심하라는 걸까.
르네도 아프리카 혈통의 영향을 받은 크리올이었지만 죽은 마르그리트가 수호하는 마르셀과 줄리앙의 집에 가면 너무 추웠다. 줄리앙에게 일부러 거리를 두지 않아도 줄리앙은 알아서 모두를 피한다. 그러나 마르셀과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르주를 보내고서야 폴이 더 환영받았다. 폴과 조르주가 드나드는 걸 알고 있으니,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직접 보지 않고도 더 깊이 볼 수 있다.
벽이었던 문을 15도쯤 열었더니 문이 투명해지면서 문틀 안쪽이 드러났다. 내부는 검은 유리를 통과한 듯한 빛으로 가득했다. 베키는 망설임 없이 직진했다. 베키와 손 잡고 있던 폴도 베키와 함께 문틀을 지나 빛 속으로 사라졌다. 베키의 걸음이 빨라지더니 폴은 어딘가에 부딪혔고, 베키의 손을 놓쳤다. 베키가 있던 자리에 조르주가 나타났다.
폴이 돌아오자 문은 다시 벽이 되었다. 벽의 색깔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틈새도 사라졌다. 베키가 들어간 이상 아무도 열 수 없는 문. 아니, 그냥 벽이었다. 너머에 다른 전시실이 있는 미술관의 벽.
“아까는 저 그림 속에 다른 여자가 있었어.”
이곳은 한때 조르주가 매일 찾아오던 방이다.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 속 등장인물은 조르주의 실제 친구들만큼 익숙했다. 그러나 그림 속에 있던 두 여자 중 한 여자가 사라졌다. 사라진 여자는 베키를 닮았다. 어쩌면 미나를 닮았을지도.
“베키가 들어갔으니까요.”
폴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이 그림은 폴과 베키를 위한 것이었다. 조르주는 베르트 모리조가 자신을 돕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베르트 모리조는 폴을 돕기 위해 조르주를 불렀던 것이다.
아니, 베르트 모리조는 베키를 돕기 위해 폴과 조르주를 불렀을지도 모른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