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희

<레베카 스톤> 18화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전편에서 이어짐)



베키는 검은 빛 속을 걸었다. 걸을수록 조도에 익숙해져서 자신이 걷고 있는 복도의 실루엣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걸 복도라고 해야할까. 베키가 걷고 있는 곳은 거대한 성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햇빛이 스미는 숲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이 모든 것이 눈보다 마음에 먼저 닿았다. 눈으로 보려고 하면 그저 검은 빛이었다. 눈을 감고 햇빛을 바라보는 것처럼, 식별할 수 없는 빛. 그럼에도 빛. 눈을 감고 있지 않기에 색은 보여도 형태는 볼 수 없는 불투명 유리같은 장막을 거친 빛.


마침내 천창이 있는 것처럼 중앙에만 강한 빛이 쏟아지는 원형의 공간에 들어섰다.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어두웠지만 벽쪽을 바라보며 암순응을 기다리면 원통형의 스크린처럼 벽 위로 흐릿한 영상이 떠다녔다. 어쩌면 이것도 마음으로 보는 형상일지 모른다. 폴을 생각하면 폴이, 미나를 생각하면 미나가, 르네를 생각하면 르네가 보이는 듯했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느껴질 뿐 지금 폴을 보고 있는 그 감각과는 달랐다. 이렇게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크린에 비친 폴의 모습이 점점 또렷해졌다. 폴의 뒤에서 다가오는 미나 이모는 훨씬 투명했다. 이모는 아기를 안고 있지만 이모에게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그저 보따리로 보일 정도로 아기의 형상은 흐릿했다. 하지만 베키가 사촌동생의 존재를 인지하자마자 앨리스와 폴 사이에 조르주가 나타났다. 조르주를 본 베키는 줄리앙을 생각했고, 줄리앙처럼 느껴지는 어느 존재가 거대한 그림자의 형태로 다른 이들을 지워버렸다.


줄리앙이라고 생각한 형상은 곰처럼 느껴졌다가 숲으로 바뀌었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폴과 앨리스의 달콤한 향기는 어느새 숲속의 풀 냄새로 바뀌었다. 거대한 곰 같은 거대한 숲을 배경으로 아기 곰처럼 줄리앙이 나타났다. 줄리앙은 보따리처럼 보이던 앨리스와 마찬가지로 흐릿했다. 촛불 그림자 같은 아기 곰. 그의 생명이 위태로운건가.


“줄리앙이 곧 죽을거야.”


베키는 저도 모르게 소리내어 말했다.


“너는 애정의 손녀구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돌리자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스크린에 비친 영사기 속 필름처럼 투명했지만 베키에게 말을 걸었다. 마야와 미나의 엄마, 베키의 할머니인 앤의 한국 이름이 애정이었다.


“나는 애정의 모친과 지내던 초희라고 한다.”


할머니의 어머니라면 살아계셔도 백살,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신 분이다. 하지만 초희라는 여자는 베키의 증조할머니를 친구나 조카처럼 부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는 귀신인가. 조앤이 들었으면 기절했을만한 말을 듣고도 베키는 오히려 정신이 또렷해졌다. 언젠가 미나 이모가 이런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 불현듯 기억났던 것이다.




미나는 방금 자신이 꾸었던 꿈과 실제 상황을 연결시켜보았다. 베키는 미술관에 있다. 꿈속에 등장한 베키는 미술관 내부에서 접속한 것이다. 베키가 달려갔던 과수원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겠지. 어떤 그림일까. 검색을 해도 되겠지만 베키와 함께 있는 폴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폴 베키랑 같이 있니?


폴에게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지우가 잠든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미나는 전송을 누르고 아기를 받아 아기침대에 눕혔다. 아기는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수면등의 조도를 더 낮추고 발소리를 죽이며 지우를 데리고 거실로 나왔다.


“베키가 접속했어.”

“베키가 후계자인거야? 앨리스가 아니고?”

“그런가봐. 베키가 특별하긴 했지.”

“큰누나도 알아?”

“지금 문자하려고.”


미나는 마야가 놀랄까봐 자신이 하는 일을 자세히 말하지 못했다. 지우도 미나의 해외활동은 자세히 모르지만, 미나가 할머니의 피를 물려받은 영매라는 사실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혼혈인 마야가 느끼는 감정은 예상하기 어려웠다. 말은 안 해도 한국 혈통에 대한 상처나 엄마에게 버림받았다는 무의식이 있을지도 모른다. 설명은 마야가 물어본다면 그때 하리라. 미나는 부연하지 않고 단문을 보냈다.


-베키가 아마 ‘접속 중’일거야


베키 본인에게도 제대로 설명한 적은 없었다. 다만 미나조차 짐작하지 못한 승계를 조르주가 눈치챘고, 그 시점에서 베키에게는 어떤 예감이 있었을거라 짐작해본다. 자기가 이상한 걸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베키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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