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베카 스톤> 20화
(전편에서 이어짐)
그때 미나는 한국에 있던 모든 것을 반쯤 정리하고 왔다. 휴학하고, 신당을 닫고, 지우에게 가족들을 부탁했다. 미국에 오라고 조르던 마야는 미나가 다시 파리로 가버려서 서운해했다. 조르주보다는 초희를 만나러 온 것임은 아무도 몰랐다. 조르주마저도 미나와의 재회가 그저 반가운 나머지 약간 어긋난 듯한 느낌을 모른척했다. 세기초, 2001년이었다.
조르주를 다시 만나고 얼마 후 조르주와 미나는 함께 방을 얻었다. 조르주는 미술대학을 다니면서 학교와 미술관에서 파트타이머로 일했고 미나는 오전에만 프랑스어 집중수업을 들으면서 서점 정직원으로 일했다. 미래를 기대하면서도 미래를 알 수 없는 청춘이었다.
르네는 그 무렵 서점에서 미나를 만났다. 르네가 정말 갖고 싶었던 건 조르주가 아니라 미나일지도 모른다. 르네는 미나와 조르주가 서로에게 영원한 1순위인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가질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수록 집착하게 됐다. 미나가 취업비자를 얻어 정착하고, 조르주도 파리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하는 동안 르네는 느슨한 우정을 가장해 그들의 주위를 맴돌았다. 오래된 커플은 간혹 따분한 시간도 있기 마련이다. 마야가 결혼하기 직전, 미나는 오랜만에 한국으로 장기 여행을 떠났다. 미나의 빈자리를 감당하지 못한 조르주가 흔들리는 것을 적당히 지켜보던 르네는 기어이 조르주를 무너뜨렸다.
조르주는 줄리앙을 찾으러 ‘어디에’ 가고 있냐는 르네의 문자에 답이 없었다. 르네는 서점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고양이를 보면서 베키를 생각했다. 폴과 베키의 사이가 좋으니 미나와 조르주가 딴짓을 하진 않겠지만, 안 하던 연락을 시작했을 거라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했다. 조르주와 르네의 딴짓의 결과였으나 조르주를 빼닮은 폴을 미나도 사랑했다. 마르셀도 르네와 폴에게 부탁하게 될 정도로.
마르셀은 조르주와 폴에게 베키를 보여주려는 미나의 큰 그림이었을까? 미나 역시 자기가 저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폴과 베키를 연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르네는 거기까지는 모른다. 다시 미나와 조르주가 연결되면서 베키와 폴까지 네 사람이 이루는 조화에 르네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건 느껴졌다. 폴을 낳은 건 르네의 전략이 아니었단 말인가. 정작 폴을 낳고 나서 조르주나 폴에 대한 애정이 예전같지 않았다는 건 르네도 인정해야만 했다.
조르주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의자에 앉아 벽을 뚫어지게 보고 있던 폴은 점점 주위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어느새 떨고 있는 폴을 발견한 조르주가 정신을 차리고 폴을 껴안았다.
“괜찮아? 아픈 거 아니지?”
“그냥 좀 추워요.”
폴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베키와 폴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이렇게 베키를 기다리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텐데. 잊고 있던 시간들의 폭풍에 휩쓸려 그 시간으로 초대받은 아들을 간과했다. 조르주는 폴의 탄생에 대한 죄책감을 털어야 했다. 폴 역시 그녀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조르주는 미나의 피가 섞이지 않은 자식을 낳을 운명이었던 것인가.
“베키에게 필요한 장소가 너에게도 보일거야.”
“그런 것 같아요. 아빠는 어떻게 알아요?”
“지금 너희가 그렇게 달려간 것처럼, 미나 이모를 판테온에 데려간 적이 있거든.”
“미나 이모를 사랑했죠?”
“알고 있었구나.”
“이모가 저를 볼 때 느껴졌어요.”
“이모도 아빠도 너를 많이 사랑해.”
조르주에게 안겨있던 폴이 조르주의 가슴을 파고들면서 속삭였다.
”저도 사랑해요.“
네 번째 극장에도 줄리앙의 비밀 친구는 없었다. 개선문 근처에 있는 극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가 있지 않았다. 그랬다면 줄리앙도 맘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비밀 친구는 비밀을 지켜주는 친구일테니, 그 친구에게도 비밀이 좀 있을 것이다. 헨리크는 자신이 좀 특이한 아우라가 있는 여학생을 찾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베키처럼 어리지만 독립적이거나, 오히려 대학생쯤 되는 누나일지라도 보통의 어른들과는 다르거나. 그런데 줄리앙은 괜찮은걸까?
점점 초조해하는 헨리크를 지켜보는 메러디스도 숨이 찼다. 헨리크의 에너지를 따라다니는 것도 힘에 부치는데 헨리크는 그 에너지를 자신을 괴롭히는데까지 쓰고 있었다. 왜? 줄리앙과 친했던가? 줄리앙은 아이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데. 줄리앙은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지만 아이들은 줄리앙에게 관심이 있지. 메러디스는 헨리크의 등을 보며 제이미를 떠올렸다. 제이미도 지금 초조하겠구나. 헨리크처럼.
마르셀은 줄리앙의 사물함을 열고 5초 동안 내부를 응시한 뒤 문을 닫고 다시 이름을 확인했다. 줄리앙의 사물함이다. 체육복도 줄리앙의 사이즈였고, 줄리앙이 쓰는 공책이 교과서와 함께 들어있었다. 그런데 평소 줄리앙의 성격과 다르게 사물함 속은 어지러웠다. 일부러 어지럽힌 느낌도 아니었다. 매번 물건을 뒤적거려서 찾은 뒤 아무렇게나 던져넣은 시간들이 쌓인 흔적 뿐이다.
집에 있을 때의 줄리앙은 마르셀이 정리한 책장의 책들을 키와 색깔에 맞춰서 다시 정리할 정도로 깔끔했다. 줄리앙의 학교 생활을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누나의 보호자 역할을 물려받긴 했으나 생물학적 삼촌도 아니고 나이 차도 크지 않아서 부모처럼 굴어서는 안 됐다. 부모의 책임감을 갖되 형제에 가까운 관계라고 스스로 세뇌했다. 아니, 형제의 의무가 있지만 혈연이 아니므로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사랑하고 책임질 것인데 법적으로 삼촌이기에 합법적이면서도 부적절한 관계.
“선생님, 줄리앙과 무슨 관계죠?”
충격을 받은 마르셀을 한동안 지켜보던 제이미가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를 소리내어 공유했다. 질문을 들은 마르셀보다 발설한 제이미가 더 놀랄 정도였다. 마르셀은 서서히 차가운 돌처럼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제이미는 자신이 수면에 던진 돌의 파장을 보기 겁나서 한발 물러섰다. 제이미는 이 학교가 유난히 춥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