덧없고, 헛되고, 속절없다
프랑수아즈 사강을 좋아하세요?
두뇌의 세탁에 독서보다 좋은 것은 없다.
건전한 오락 가운데 가장 권장해야 할 것은
자연과 벗하는 것과 독서하는 것
이 두 가지라 하겠다. - 소설가 도꾸도미 로까
제가 책을 읽는 이유는요
작가가 나에게 말을 거는 순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다가 어느 부분에서 '딸깍' 하고
나와 맞아떨어지는 문장을 발견하면
그 책은 그냥 책이 아닌, 나를 찾는 통로가 되어주거든요.
그 순간이 주는 묘한 안정감? 같은 것이 있어요.
붕 떠있던 감정들이 자기 이름표를 발견하고
얌전히 가라앉는 느낌이랄까요.
또 그 부분에 밑줄을 치거나, 필사를 할 때는
상자에 반짝이는 보석 하나를 채우는 느낌도 들고요
그런 느낌을 강렬하게 주는 작가가
프랑수아즈 사강입니다.
'안녕' 파국을 맞아들이는 인사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책이 ‘필독서’였던 때가 있었는데
전 그때, 많은 고전들에게 그랬듯 읽다 덮어버렸어요.
그리고 글이 너무 허세스럽다며
내 얕음을 합리화하곤 했는데...
한참 후에 다시 읽은 '슬픔이여 안녕' 은
밑줄을 치다 치다 지쳐서
통째로 상자에 넣어둔 책이 됐습니다.
19세 소녀가 이런 우아하고 정확하고
자연스러운 리듬의 문장들을 썼다니
프랑스 문단의 작은 악마, 혹은 괴물로 불린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이 여자 좀 미친것 같아요.
'슬픔이여 안녕'에서 그녀는 인간을,
혹은 자기 자신을 치열하게 분석합니다.
모든 인간이 가진 우아함과 경박함
사랑과 시기, 동경과 경멸, 순수와 계산 등
인간의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양면의 감정들을
이야기 위에 유려하게 얹어서 보여줍니다.
제가 좋아하는 문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열일곱 소녀 세실은 아빠와 결혼을 약속한 여자의
등장으로 혼란스러운 세계를 경험하는데
새엄마가 자신의 삶을 온통 바꿔버릴 것 같아
두려움과 미움과 가책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작품을 탄생시킨 비극적 생각을 하게 되죠.
그 여자를 우리 앞길에서 떼어놓아야 한다는 생각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고 중얼거렸지만
내 의지와는 반대로
머릿속에서는 생각이 계속되었다.
...
그토록 불안정했던 지난날이
더없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 삶에선, 생각할 자유
잘못 생각할 자유
생각을 거의 하지 않을 자유
나 스스로 내 삶을 선택하고
나를 내 자신으로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나는 점토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나 자신이 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점토는 다른 사람에 의해
틀에 부어지는 것을 거부한다.
이런 문장을 쓸 때의 작가는 잠시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는 걸까요.
인간을 나누고, 분해하고, 쪼개 살펴보다가
창세기, 신이 인간을 빚은 흙까지 닿은 걸까요.
이 문장에선
자유에 대한 그녀의 인식이 드러나기도 하죠.
불행한 안정보다
자극적인 위험을 택하며 살았던,
자유를 가장 큰 권리로 여겼던 사강의 삶
소심한 저로써는 멋진 언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외로움이 떠민 입맞춤
프랑수아즈 사강의 또 다른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넘어가 볼게요.
이 소설의 문장 속엔
나도 있고, 내가 아는 여자도 있고,
날 스쳐간 남자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 책에서 자신을 발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속에선 39세의 한 여자가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는데요.
사랑하지만 바람둥이인 남자와,
어리고 열정적인 남자예요.
바람둥이 남자친구에게 지친 여자는
줄곧 밀어내던 어린 남자가 보낸
단 두 줄의 편지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 편지 내용은요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별거 아닌 내용이죠.
심지어 그녀는 브람스를 좋아하지도 않아요.
하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은
그녀에게 시적인 언어로 다가와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질문이 되고
한 남자에게서 다른 남자에게로
마음이 옮겨가는 순간이 돼요.
그녀에게 감정이입을 하며 읽어보세요
책 한 권을 읽는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도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시몽의 편지를 떠올리며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넘어갔습니다.
아니, 이미 넘어갈 준비가 되어 있었죠.
남자에게 브람스 연주회는 데이트 핑계였지만
생활 너머의 것들을 즐길 여유조차 잃은 여자에게
브람스는 열린 창문의 햇살처럼,
잊고 있던 모든 것이 되어 다가온 겁니다.
그렇다면 브람스 연주회를 다녀온 둘의 사이는
깊이 뿌리내렸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의 입맞춤은 브람스의 음악처럼
낭만적 변주에 불과했어요.
사랑이 뭐 그런 거 아닌가요?
라고 사강은 끊임없이 이야기합니다.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한 사람 사이의 감정을
매혹적으로 보여주는 사강의 글은
이상하게도 다시 그 묘한 사랑을 동경하게 만듭니다.
사랑에 지쳤을 때도
사랑을 잊었을 때도
감성을 변주시키기에 충분한 책입니다.
두서없는 글이지만 그냥 올리겠습니다.
쓰다 보면 구성이 자리 잡겠죠
전 읽고 쓰며 백수생활을 즐기려 합니다.
힘든시기 모두 힘내시고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