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대는 군대다
수련을 시작 전 호흡할 때 흐르던 눈물은 2주 차에 접어들자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집에 가고 싶다는 잡념도 희미해졌다. 고양이 할머니, 아니 혜주 할머니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할 뿐 말을 더 붙이진 않으셨다.
삼양해수욕장을 갔던 그날 이후 삶의 패턴이 바뀌었다. 새벽엔 요가원, 점심엔 원당봉, 두 곳만 갔던 일상에 바다가 추가되었고 하루는 요가원 원당봉, 다음날은 요가원 바닷가를 다녔다.
삼양 해수욕장은 그날 처음 간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이 세 번째였다.
첫 번째로 해수욕장을 갔을 때,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고 엉겁결에 두 번째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퇴사 후 당장 갈 데가 없어 원룸을 알아보던 나에게 대학 선배가 방을 구할 때까지 자신의 자취방에 머물러도 된다고 했다.
신세 지기 싫었지만 엄마의 집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기에 나는 덥석 언니의 방으로 들어갔다.
지원 언니와 나는 특별한 관계다.
그녀는 대학에서 사귄 가장 친한 친구이자 선배이다.
우리는 묘하게 공통점이 있었고 그런 서로를 애초에 알아보았다.
나는 겉으로 보기엔 늘 웃었지만 반골 기질이 있었다. 그건 지원 언니도 마찬가지였다.
연극을 전공했던 우리는 연극과는 어울리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할 수 있을지라도 일상생활 속 연기엔 영 소질이 없었다.
겉과 속이 투명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사회성 부족이었다.
다만 우리의 스타일은 좀 달랐다.
지원 언니는 반골 기질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고, 뒤끝도 없었으며,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나는 드러내고 싶지 않은 데 결국 드러나고야 말아서 혼자 끙끙 앓았었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들이 많아 자유롭게 무대 위에서 펼쳐보리라 생각하며 들어갔던 연극학과.
다행히 실기 전형이 아닌 수능 전형이 있었고 나는 연극하는 사람들의 열정적이면거도 비범한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생활은 내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신입생 시절부터 내 안의 NO 맨이 등장했다.
그 시작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신고식’
신고식은 D대의 역사와 함께했고 그 역사 속에서 지금은 대한민국 최고가 된 배우들의 전설들이 내려온다.
신고식 전부터 동기들 사이에서는 얘기가 많았다. 이런저런 말이 많아질수록 마음속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대망의 신고식 날
학과 소극장 앞쪽에 신고식을 치를 신입생을 위해 화려한 조명을 비춘다.
무대 뒤쪽에는 소주와 신입생들이 열 맞춰 대기한다.
2학년 선배는 예술대학에 걸맞게 필름통에 소주를 넘치지 않을 만큼 채운다.
신고식을 치를 신입생은 경건하게 필름 통을 받아 소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며칠 전까지 열아홉
소주를 그렇게 순식간에 들이킨 적이 있는 신입생이 얼마나 될까? 이런 의문을 가질 여유는 없었다.
연극 대사를 외우듯 자기소개를 달달달 외워야 하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땡땡 고등학교를 졸업한 주민등록번호 11111111 2222222 연기 전공(혹은 연출 전공) 아무개입니다!!!!”
한 문장 안에 출신학교, 주민 번호, 이름이 알차게 들어가 있는 대사.
술기운이 올라와 몽롱한 정신에 인생 첫 번째 연극(?) 대사를 연습하며 무대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 작다!”
“왜 버벅거려! 다시 해!”
“벽 보고 서!!!”
선배님들의 날카로우면서도 신이 난 목소리가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신고식 대사를 외우며 덜덜덜 떨다 보니 내 차례가 되었다.
들어가기 전 벽 보고 서기만 안 걸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벽을 보고 선다면 무한 대기했다가 벽과 하나 된 자신을 잊지 않은 배려 깊은 선배의 부름에 다시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통과될 때까지 반복. 그런 특권을 누리고 싶지 않았다.
“들어가!”
툭툭 치며 속삭이는 이름 모를 선배의 말에 취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한 발 한 발 늠름하고 씩씩하게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술기운인 건지 과도한 긴장 때문인 건지 한껏 흥분한 채로 조명 아래 섰는데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생애 태어나 처음 맞는 무대 조명
숨죽인 관객들
전 세계가 나를 주목하는 순간, 준비한 자기소개를 외치며 나는 생각했다.
토할 것 같다.
다행히도 별 특징이 없던 나는 간단한 성대모사 후 신고식을 무사히 넘겼다.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출신 학교, 외모, 사는 곳, 가족 중에 선배가 있는가, 소속사 그런 거를 말한다
나는 그런 면에선 무색무취였고 그렇게 나의 첫 무대에서 조용히 퇴장했다.
이런 신고식은 신고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의문만을 남긴 채.
강렬한 신고식 이후에 신입생은 다시 고등학생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배들은 자유보다는 통제와 규율로 개성 강한 신입생들의 패기를 진압했다.
2학년의 주도로 8시 조회와 5시 반 종례 실시!
지각생 발생 시 훈계가 시작됐다.
총원에 빠지는 인원이 생기면 그 인원이 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
혹시나 연락을 받지 않으면 1학년 과대는 어떻게든 찾아내야 했고 나머지는 의자에 등을 떼고 앉아 속으로 그 동기의 욕을 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추억이라고 하지만 당시 8시까지 나가야 하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왜냐하면 종례가 끝나면 선배들의 연극 스태프로 들어가 갖은 심부름을 하고 대기를 했기 때문이다.
신입생은 한 달 가까이 예술대 건물 안에서 마주치는 동기가 아닌 모두에게 자기소개를 외쳐야 했다.
혹시나 선배를 몰라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누가 봐도 미대생이어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사를 하면 그들은 처음엔 고개를 갸웃하다가 나중엔 본채 만 채 지나갔다.
찰나의 눈빛엔 너도 참 안 됐다. 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보충수업과 야간자율 학습보다 더 빡센 스케줄과 군기
그렇다. 내가 다녔던 D 대는 군대라 불렸다.
우리는 얼차려로 PT를 1000번 하기도 하고, 남자 동기들은 원바이원 나무막대기로 궁둥이를 두드려 맞기도 했으며, 다짜고짜 남산 꼭대기를 찍고 오기도 했고, 하도 열받아서 선배의 커피에 설사약을 타고 침을 뱉으며 추억을 쌓고 적응해 나갔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제일 어려운 건 바로 위 선임, 2학년 선배였다.
지원 언니는 2학년 중에서 늘 빙긋이 웃고 있던 사람이었다. 불교 학교였던 D 대에 있던 불상과도 비슷한 미소.
본인들이 2학년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연극이라는 멋에 취하던 선배들 사이에서 그저 연기에 집중하던 지원 언니랑 친해지고 싶었다.
당시 나는 반골 기질을 감추려 애쓰며 선배들에게 예의를 차렸지만 이상하게 지원 언니 앞에선 굳이 애쓰지 않았다.
애를 쓰지 않아도 될 만한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속에서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언니의 의상을 사고, 바느질을 하며 오간 대화들 속에서 군기가 아닌 온기를 느꼈다.
한 살 위였지만 대 여섯은 성숙해 보이고 모든 걸 해탈한 미소를 짓던 언니를 닮고 싶었다.
내가 공무원이 되었을 때 언니는 축하하면서도 의아해했다.
“와… 너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연극을 더 할 줄 알았는데 결국 합격했네? 어머니가 좋아하시겠다.”
내가 퇴사했을 때의 반응은 축하에 가까웠다.
“되는 것보다 그만두는 게 더 힘들었을 텐데. 고생했어.”
유일하게 퇴사 후 뭐 할지 묻지 않던 사람이 지원 언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언니는 말 대신 나에게 방을 내줬고 한 번 가보라며 훗날 두 번째 직장이 된 곳을 소개해 줬다.
그런 언니가 갑자기 결혼을 한다며 전화가 왔었다.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결혼까지 할진 몰랐기에 내심 놀랐다
“웨딩사진 찍으러 제주에 갈 건데 같이 가줄 수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공무원 퇴사 후 심해로 가라앉지 않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이다
언니와 예비신랑과 함께 제주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두 곳을 갔다.
첫 번째 웨딩 스폿은 백약이 오름
결혼의 이미지와 비슷한 오르막 계단에서 넓게 펼쳐진 들판과 사람들, 멀리 보이는 소를 배경으로 예비부부는 포즈를 취했다.
사진 기사의 지시에 따라 언니와 예비신랑은 다양하면서도 심플한 웨딩 무드를 연출했고
나는 언니의 드레스 밑단을 정리하고, 콧등에 땀을 닦아주고, 손거울을 보여주었다.
8월 제주의 뜨거운 열기로 언니의 얼굴엔 땀이 송골송골 맺혔으나 언니는 웃음은 시원하기만 했다.
해가 질 때쯤 우리는 삼양 해수욕장으로 이동했다.
노을 지는 삼양 해수욕장은 야외 웨딩숍을 방불케 했다.
곳곳에 예비부부들과 촬영팀이 산재해 있었다. 주차장에서부터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촬영기사와 예비남편이 뛰어가고 언니와 나는 천천히 뒤를 따랐다.
트렌드에 맞춰 검은색 원피스와 흰색 셔츠를 입은 두 사람.
사랑에 색깔이 있다면 저런 빛깔일까 하는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처럼 서있었다.
문득 아득한 마음이 들었다.
언니의 행복을 눈앞에서 목격하니 진심 어린 축하의 의미가 뭔지 알 것 같아서 울컥함이 밀려왔다.
동시에 나와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그녀를 보내기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같은 꿈을 꾸다가 포기했던 동료, 인생의 다음 페이지를 격려하던 동지가 혼자 어른이 되어 다른 행성으로 떠나고 있었다.
우리는 해가 지고 난 후까지 촬영했고 근처 고깃집에서 흑돼지를 먹었다.
하루 종일 고생해서인지 다들 허겁지겁 제주의 돼지를 맛보았다.
예비 형부와 포토그래퍼는 얼큰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갔고 나와 언니는 해수욕장 벤치에 앉아 과자에 맥주를 먹었다.
“오늘 같이 와줘서 고마워. 새로 시작한 거는 어때? 선생님이 의외로 잘한다고 칭찬하시던데….”
“네 재밌어요. 저야말로 고마워요. 저한테 딱 필요했던 곳을 소개해 줘서.”
“너도 참 이것저것 많이 했다. 연극에, 수험공부하며 아르바이트하더니 결국 공무원, 그리고 지금 하는 일까지. 남들은 한 번 하기도 힘든 극과 극에 있는 직업을 경험했어. 게다가 난 그냥 너 쉬라고 보냈는데 거기서 일자리까지 얻다니 참 대단해. “
언니의 말을 들으며 지난날을 돌아보니 내가 대단한 건지 아니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지 복합적인 마음이 들었다.
제주 밤바다에 떠있는 불빛이 흔들거렸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어때? 만족해?”
언니가 물었다.
“네. 내가 배우고 싶은 거 배우면서 돈까지 벌 수 있으니까 감사하죠.”
“그게 뭐가 그렇게 좋아? 흠뻑 빠졌던데.“
“판단하지 않아서요. 연극할 때는 판단되는 게 기본이었잖아요. 지금 하고 있는 건 판단하지 않아서 좋아요.”
“맞아. 모든 게 다 판단되었었지. 얼굴, 분위기, 몸매, 목소리, 재능. 우린 판단받기 위해 존재했었어.
근데 그건 배우의 숙명과도 같잖아. 애초에 그걸 알고 시작한 것인데도 나도 그게 참 힘들었어. 결국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은 취미로 남겨두자. 해서 관뒀지. 그래도 너는 좀 더 버텼었잖아. “
“졸업하고 겨우 3년 버텼는데요. 그것도 아주 희미하게. 여러 번 포기하고 다시 도전하면서. “
작품을 하다가 어그러진 시간, 오디션에 떨어져서 아르바이트에 몰입하던 시간, 포기하고 잠시 백수로 머무르던 시간을 포함하면 24살에서 27살까지 단 3년을 버텼다. 질질 끓었다는 거에 더 가까울지도.
대학 시절까지 생각하면 총 7년.
나의 꿈은 7년으로 마무리되었다.
언니의 고백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열등감을 털어놓았다.
“판단되는 건 배우의 일이니까 머리로는 이해하는 데 마음으로는 인정하기 힘들었어요.
나중엔 스스로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어요. 자신에 대한 판단이 너무 형편이 없어서 자존감을 갉아먹었고요.
내가 쟤보다 예뻤다면, 나도 키가 크고 날씬했더라면, 주인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왜 나는 말괄량이, 할머니, 남자, 술주정뱅이, 심술궂은 아줌마 같은 것만 해야 할까?
그냥 내 매력을 찾고 인정했으면 되는 데 어린 마음에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내 판단 기준으로는 나보다 대사도 못 치고 연기도 못하던 애가 자꾸 주인공을 하고. 나한텐 기회조차 주지 않으니까 열등감이 비대해졌어요. 근데 사실 연극에선 이미지가 전부인데. 그게 예선인데 말이죠.”
이제는 이해한다. 보여줘야 하는 직업에서 보여주는 게 전부라는 걸. 일단 보게 하려면 외형적 조건들이 ‘미’의 기준에 부합해야 한다는 걸.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종하는 게 예술이고 본능이라는 걸.
나는 보통 평범한 사람이다. 추앙할 만한 존재는 아니었다. 외모도, 연기도.
어디 가서 못났다는 말보다는 그래도 예쁘다는 말을 듣는 편이었으나 연극 학부 시절부터 예쁘지 않음의 대명사가 되었다. 동기들의 얼굴은 계란이었다면 내 얼굴은 타조알이었고 동기들의 몸매가 대나무였다면 내 몸매는 수령이 오래된 두꺼운 나무였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나를 보시더니 갑자기 말씀하셨다.
“너는 정말 각설이다.”
하하 하하 하하 하하. 웃으면서 경청했다.
그날 집에 돌아와 자기 전 각설이를 떠올렸다.
다른 동기에게는 “넌 정말 인형같이 생겼다.”라고 말하던 교수님의 미소 띤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후회해?“
생각에 잠겨 씁쓸한 미소를 짓는 데 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 가끔 후회해. 그래서 요즘엔 연극이나 뮤지컬 보러 안가. 취미로 남겨 두기엔 애정이 너무 깊었어.
고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만 하고 살았으니까… 그래서 오히려 전혀 관련 없는 공무원 하는 네가 부럽기도 했어.”
“저도 가끔 후회하죠. 그냥 인정했더라면, 인정하고 버텼더라면. 배우로서 큰 꿈을 꾸지 않았다면 오히려 계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어요.
왜 처음부터 눈에 띄는 애들을 제외하면 정말 배우 같지도 않은 애들이 제일 오래 한다는 얘기도 있었잖아요.
그러기엔 전 자아도 주관도 쓸데없이 강했어요. 지나고 보니 대학 신고식 때 왜 그렇게 신입생 기를 죽여놨는지, 왜 군대처럼 조회를 하고 종례를 했는지. 소속사 있는 연예인들도 똑같이 행동하게 했는지 알겠어요. 다짜고짜 필름통에 술 먹였던 건 좀 너무했지만. 하하.“
그날 우리는 밤새 대화했다.
언니는 잘 지내려나?
궁금하지만 연락할 용기가 없다. 지난 1월 언니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그전부터 나는 가라앉고 있었고 일이 있어 못 간다는 말과 함께 부조만 보냈다. 언니가 소개해 준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둔 것도,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도 미안해서 언니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카톡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미안함은 더욱 쌓여갔고 연락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