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섬 Dec 12. 2024

삼양해수욕장에 가다

소녀와 고양이를 만나다

눈을 뜨자 몸뚱이 전체가 뻐근해 고개만 움직여도 신음 소리가 나온다.

밤새 대형 가위에 눌린 듯한 기분이다.

지난밤 엄마에게서 온 전화 때문인 건지 느닷없이 시작한 요가 수련 때문인 건지 눈꺼풀마저 무겁다.

간신히 생겨난 의지가 허무하게 사라진다. 괜히 등록했나. 주 3회만 할 걸 그랬나. 15만 원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는데 알람이 울리자 흠칫 놀라며 끈다. 어젯밤, 요가를 가기 위해 알람을 맞추고 잤다.

5시 반. 눈곱만 떼고 천천히 걸어가기에 알맞은 시간이다.

의지와 나태의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이대로 이불 속에 잠겨 꼼짝 않고 싶지만 돈이 아까워 일어난다.


차가운 공기 속에 바다 내음이 실려온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바닥만 보며 걸음을 뗀다. 엄마는 왜 전화한 걸까.




안녕하세요.

상큼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검정 덩어리 여자가 웃고 있다. 오늘은 하얀 경량 패딩. 빨간 요가 바지와 어울린다.

패딩이 살찐 거였구나. 잔머리 한 올도 용납하지 않게 질끈 묶은 머리에 진한 눈썹 밑으로 보이는 더 진한 쌍꺼풀눈이 웃고 있지만 카리스마가 비친다.

안녕하세요. 고개 숙여 인사하며 마음속으로 ‘그냥 먼저 가주세요’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무관하게 그녀는 보조를 맞추며 말을 잇는다. 아까 길목 편의점 건물에 사시나 봐요! 그동안 새벽에 자주 뵀었죠~! 원당봉 자주 가세요? 괜히 말이 길어질까 어색하게 웃으며 ‘네’라고 대답하자 나의 의도를 눈치챈 것인지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는다.


두 사람의 발소리와 숨소리가 거리를 채운다. 대화 없이 나란히 걷는다는 게 이처럼 어색한 일인가. 대화를 해도 어색할 텐데 차라리 대화가 없는 게 나은 건가.

그러는 사이 현재에 대한 긴장이 과거를 밀어내고 있다.


요가원 건물에 다다르자 아래쪽에서 걸어오는 덩치가 유독 큰 남자아이가 우리를 향해 목례한다.

여자는 “어~ 오랜만이네!” 대답하고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차례로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셋의 발자국 소리가 계단에 울리자 심장도 발소리만큼 세차게 울리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선생님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른다. 우리는 차례로 인사한다.

텁텁한 향기, 오리엔탈적인 음악, 난로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어제와 같다.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가 앉는데 아까 그 여자가 나에게 담요 하나를 가져다준다. 저기 있으니 사용하시면 돼요.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문 옆쪽 안으로 들어간 공간에 탈의실과 작은 문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다. 탈의실 앞에는 요가 매트가 서너 개가 서있고 허리 정도 높이의 나무로 만든 함이 보인다. 감사합니다.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쿨하게 제일 앞쪽으로 가 나의 사선 방향 구석에 눕는다. 우리와 같이 들어온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옷도 벗지 않고 테이블에 앉아있다.


“여행 잘 다녀완?”

(여행 잘 다녀왔어?) 선생님이 묻자

“네.” 짧게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선생님에게 건넨다.

“와~ 나 이거 정말 좋아하는데! 고마워 잘 쓸게.”

“뭔데요?”

누워있던 여자가 고개만 돌린 채 그들을 향해 묻는다

“서준이 인도 갔다 오면서 히말라야 립밤 사 왔네요.” 선생님이 대답하자

“서준이 다정하다이~ 어휴… 우리 승현이도 서준이 같으면 참 좋겠다.” 하며 다시 고개 돌려 눕는다.

나는 다리에 담요를 덮고 그대로 앉은 채 핸드폰만 만지작거린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넘기며 선생님이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우 무사 영 추우니.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걸 한게요! 오! 서준이 완~?”

(어우 왜 이렇게 춥지. 안녕하세요! 오늘은 한가하네요! 오! 서준이 왔니?)

고양이 할머니가 들어온다. 그 후 3명의 사람이 들어오며 차 테이블에 앉는다. 별 말은 오가지 않는다.

시간이 6시가 가까워지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나며 서너 명이 한꺼번에 들어온다. 차를 마시며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로 돌아가 앉고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음악을 끈다.

“수련 시작하겠습니다”




눈을 감고 코끝을 바라본다. 나와 공간을 연결하는 숨의 길목에서 호흡이 들어왔다 나간다. 명치쯤 꽉 얹힌듯한 답답함에 입을 벌려 커다란 한숨으로 내뱉고 싶은 마음이 올라온다. 가슴을 들썩이며 길게 내뱉자 짧은 숨이 단숨에 들어온다. 갑자기 눈물이 차오른다. 집에 가고 싶다.

집?

집이 어디지?


“양손 천천히 가슴 앞으로 가져와 합장합니다. 손끝을 향해 고개 숙여 자신에게 인사합니다. 양손 무릎 위에 올리고 천천히 고개 들고 눈을 부드럽게 뜹니다.”

촉촉해진 붉은 눈을 뜬다. 너무 밝지 않아 다행이다.

“오늘은 우르드바 다누라 사나를 목표로 하겠습니다.”

말이 끝난 후 목, 손목, 발목 순으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다. 발목을 까딱거리는데 한 달 만에 힘이 생긴 다리가 신기하다. 인간을 지탱하는 다리가 이렇게 쉽게 약해지고 쉽게 강해질 수 있다니 새삼 놀랍다.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




일주일 내내 빠지지 않고 오전 수련을 갔다.

평일에 가야 할 곳이 생기니 없던 요일 개념도 돌아왔다.

지금은 토요일 오전. 관절과 근육이 여전히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동안 있는 듯 없는 듯 대하더니 왜 자꾸 늘렸다 힘줬다 이리 돌렸다 저리 돌리냐며 시위를 한다.

몸이 무거우면서도 가벼워지는 느낌이다.

침대에 누워 열어둔 커튼 덕분에 방바닥에 누운 햇빛을 바라본다. 문득 한 끼도 먹지 않았다는 생각에 허기가 올라온다.


오후 1시 34분.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어 밖을 보니 내천 옆으로 원당봉으로 향하는 길이 보인다. 더 풍성 해진듯한 가로수 초록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따뜻해진 4월의 공기에 나뭇잎 향기, 바다 내음이 뒤섞여 방 안으로 들어온다. 뭘 시켜 먹을까. 그냥 좀 더 누워있을까 하다 야상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편의점 오른쪽으로 꺾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다.


바다 향기가 다가오자 미묘한 두근거림이 올라온다. 맞은편에 삼양 해수욕장 입구가 보인다.

양산을 쓰고 가는 아주머니. 손을 잡고 바다로 가는 연인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아기 엄마들이 해수욕장 입구에서 서로를 스친다. 길을 건너가 입구를 지나니 멀리서만 보던 바다가 눈앞에 넓게 펼쳐진다.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푸석한 얼굴, 더 이상 기름지지 않은 머리카락, 축 늘어진 야상, 무릎 나온 검은 운동복 바지를 훑는다. 비로소 제주를 느끼자 가슴속에 뭉쳐있던 덩어리 일부가 잘게 쪼개져 날숨과 함께 바다로 흘러간다. 한참을 멍하게 서 있다 사람들을 따라 걷는다.

비어있는 벤치에 앉는데 숨이 가쁘다.


앞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계단에 앉아서 멍 때리는 사람, 모래놀이하는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가 보인다. 한쪽에선 통통 튀는 목소리로 제주에 왔다며 영상통화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뒤로 하얀 포메라니안과 산책하는 선글라스를 낀 아저씨가 지나가고 삑삑 신발 소리를 내며 걷는 아기가 멍멍이를 보자 엄마 손을 놓고 그쪽으로 걸어간다. 경계가 뚜렷한 바다와 하늘이 그들 뒤로 서있다. 검은 모래여서인지 바다는 푸릇하기보다는 남색에 가깝다. 바다와 면하는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어 쨍하고 순수한 하늘 빛깔이 바다보다 발랄하다.

자연을 병풍 삼아 사람들이 삼삼오오 맨발로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평일 낮인데도 사람이 많다. 바다 풍경도 놀랍지만 이 시간에 여기 있는 사람들도 생경하다. 저마다 표정에 활기가 있다.

꾸며내지 않은 생생한 기운.

사람들의 웃음소리, 말소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가 한데 엉켜 윙윙 거린다.


눈시울이 뜨겁다. 손끝으로 눈물을 찍어 닦아낸다. 다행히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흐르진 않는다. 누가 보면 뭔 사연 있는 여잔 줄 알겠네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까 걸어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며 멀리까지 펼쳐진 바다를 본다. 입구로 나오니 잊고 있던 허기가 올라온다. 뭐라도 사가야겠다며 고개를 돌리지만 보이는 건 횟집, 고깃집,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지겹고, 횟집 고깃집에선 사갈 것도 없거니와 돈도 없다. 갑작스러운 돈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온다. 뭘 사 가지.. 고민하며 사람들이 향하는 방향으로 휩쓸려 걷는다. 왜 이들을 따라가는 건가 하는데 어느새 또 바다가 나온다. 아까 나오는길에서 봤던 반대쪽 바닷가인가 보다.


입구엔 정자가 있고 인도와 도로가 나란히 길게 뻗어있다. 해수욕장과 다른 고즈넉함에 이끌려 걸어가는데 아가씨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아니겠지 하면서 발길을 옮기자 다시 한번 아가씨 한다. 슬쩍 뒤를 돌아 정자를 보니 고양이 할머니가 여섯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앉아있다.


아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자 웃으며 어디 가냐 묻는다. 그냥 바다 산책하러 나왔어요 하니 와서 김밥을 먹으라고 말씀하신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할머니 옆에 앉아있던 꼬마가 일어서더니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맑고 명랑한 목소리. 똑 단발에 눈이 조그만 여자아이가 웃고 있다. 아이의 호의를 거절하기 어렵기에 그들 옆에 가서 앉는다.


“다가미 김밥이에요~ 야채가 많앙 깔끔해요.”

할머니께서 젓가락을 건네주시며 말씀하신다.


“요가는 좀 할만해요? 낮에 이렇게 산책도 하면서 몸 챙기니 혈색이 좀 달라진 거 닮기도 하다이. 딸 같앙 그러는디 말 놔도 돼애~?”

(요가는 좀 할만해요? 낮에 이렇게 산책도 하면서 몸 챙기니 혈색이 좀 달라진 거 같아요. 딸 같아서 그러는데 말 놔도 돼?)


자연스러운 할머니의 반존대에 네라고 웃으며 대답한다.


“저번에 등록 안 한덴 행 안 보이난 안 다닐 거구나 햄쭈.“

(저번에 등록 안 한다고 하고 안 보여서 안 다니겠구나 생각했어요)


흡!!!

날 기억 못 하나 했는데.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아…네 체험해 보고 결정하는 게 괜찮을 것 같아서요.”


“맞아이. 나도 체험해 보고 한 거어~.“

(맞아요. 나도 체험해 보고 한 거예요.)

거기 1층 반찬가게 오픈 할띠 체험 쿠폰 줘났 주게.

(거기 1층 반찬가게 오플 할 때 체험 쿠폰 줬었어요)

1층 반찬가게 사장이 건물주! 반찬도 막 맛 좋아.

(1층 반찬가게 사장이 건물주예요. 반찬도 아주 맛있어요)

겐디 처음 며칠 막 힘들어 행게만은 이제는 좀 나아진 거 닮아. 선생님이 뭐랜 뭐랜 꼬부랑 말하는 거도 잘도 잘 알아듣는 거 닮더라 이. 나는 아직도 하멍 그게 그 말인지 저 말인지 막 헷갈린다게.”

(그런데 처음 며칠은 아주 힘들어했었는데 이제는 좀 나아진 거 같더라. 선생님이 뭐라고 뭐라고 꼬부랑 말하는 거도

아주 잘 알아듣는 거 같고. 나는 아직도 하면서 그게 그 말인지 저 말인지 아주 헷갈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사투리에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어 미소로 대답하며 살포시 김밥을 입속으로 밀어 넣는다.


!!!!!!

상상하던 김밥이 아니다.


아삭한 양배추의 식감과 건강하면서도 달큼한 향기가 미각을 자극한다. 달짝지근한 소고기 양념이 자칫 비릿할 수 있는 양배추 샐러드를 감싸며 채소와 고기의 환상적 조화를 탄생시키자 위장에서 더 빨리 김밥을 주입해 줄 것을 재촉한다. 열심히 턱을 움직여 하나를 단숨에 꿀꺽하고 또 하나를 집어넣는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가 옆에서 외계어 같은 사투리로 끊임없이 말을 잇고 아이는 옆에서 뉴진스 노래를 흥얼거린다.


“아고 배고팠구나게.”

(아고 배고팠구나)


할머니의 말씀에 입에 김밥을 가득 문채 미소로 대답한다.


“겐디 이름이 뭐어? 우리 손주는 혜주. 나는 혜주 할머니라고 부르민 될 거.”

(그런데 이름이 뭐야? 우리 손주는 혜주. 나는 혜주 할머니라고 부르면 돼)


“(오물오물) 김유진이요.“


“이름도 예쁘네 이. 얼굴도 희고 막 고왕 처음부터 육지사람 같안~.”

(이름도 예쁘네. 얼굴도 희고 아주 예뻐서 처음부터 제주도사람 같지 않았어)


예쁘다는 말을 너무 오랜만에 들어 얼굴이 화끈하다. 화로 인해 올라오는 열기와는 다른 뜨거움이다.

김밥 한 알 한 알을 음미하며 한참을 오물거린다. 거의 다 먹었을 무렵 기다렸다는 듯이 혜주가 말을 걸어온다.


“이모! 고양이 좋아해요?”

“아니…어 좋아해.”

“고양이 좋아하면 여기 자주 오세요. 나는 고양이 키우고 싶은데 할머니가 키우지 못하게 해서 못 키우거든요. 우리 동네에 길 고양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저기 밑에 고양이 급식소 있어요. 그래서 저는 거의 매일 와요 우리 할머니랑. 제가 보여줄게요 같이 갈래요.?”


혜주의 손을 잡고 바다와 마주하는 길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니 길 입구에 작은 세모난 집 지붕에 고양이 급식소 표지가 붙어있다. 집 주변으로 대여섯 마리의 고양이들이 모여있다. 호기심에 급식소 안을 들여다보니 렌즈통 같이 두 개가 붙어있는 밥그릇은 비어있고 테두리에 물이 살짝 남아있다.


짜장면처럼 까만 고양이, 검은 등과 귀와 대비되는 하얀 얼굴의 고양이, 황토색에 갈색이 섞인 호랑이 같은 고양이가 급식소 앞에서 살을 맞대고 자고 있다.

계단 밑에는 갈색 고양이와, 나를 닮은 듯한 하얗고 통통한 고양이가 눈을 껌뻑껌뻑 하며 졸고 있다.


햇빛을 받아서일까 밥을 잘 먹어서일까 고양이들은 털에 윤기가 흐르고 제법 통통하다.

따사로운 볕을 쐬며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낮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니 덩달아 졸음이 몰려오는데 혜주가 삼양이, 원당이, 까망이, 모래, 호랑이라며 하나하나 이름을 말해준다.


나른하고 새하얀 원당이가 유독 반갑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