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섬섬 Dec 09. 2024

이것은 MZ공무원의 퇴사이야기?

요가로 진을 빼서 그런지 까무룩 낮잠이 들었다가 진동 소리에 깬다. 앱 알림인가 하며 폰을 들었는데 엄마에서 온 전화다. 잠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숨까지 정지한다. 폰을 뒤집어 이불 위에 올려두고 기다리는데 쉽게 꺼지지 않는다. 2년 만에 온 엄마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받았다면 엄마의 한숨이 먼저였을까 우는소리가 먼저였을까.


엄마는 유독 나에게만큼은 자비가 없다.




서른 살, 늦은 나이에 취직한 나는 원래도 견고하지 않았던 자존감이 바닥으로 꺼지고 있었다.

3년의 공무원 수험생활은 없던 사회성도 더욱 없게 만들었고, 합격의 기쁨은 연수원에서 잠시뿐이었다.

2개월의 짧은 수습 기간 후 정식 발령이 났다. 당시 나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땅이 실제로 농지인지 아닌지를 확인하여 농지를 취득하려는 사람에게 증명 서류를 발급하는 것이었다.


사무분장을 하자마자 급하게 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사고, 운전도 잘 못하는 채로 이 밭 저 밭을 돌아다녔다.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내가 근무했던 지역은 리얼 농부가 농사를 짓는 곳이 아닌 언젠가 개발을 기다리는 무늬만 농지들이 가득한 동네였다. 때문에 상대하던 사람들도 농부보다는 개발할 땅을 매입하는 사람들을 대신해 서류를 처리해 주는 법무사였다. 그중 유독 항상 화가 나있던 사람이 있었다. 서류 발급 여하에 따라 고객의 경매 물건이 낙찰받을 수도, 억 단위 계약금을 날릴 수도 있는 상황이라 그는 늘 미간을 찌푸린 채 등장해 언제까지 되느냐고 묻곤 했다. 초반엔 그 민원인의 말이 질문인 줄 알았지만 얼마 안 가 내일까지 처리해 놓으라는 명령임을 알게 되었다.


“내일까지 되냐고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확답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할게요.”

“하… 내일까지 꼭 해주세요. 좀 부탁드립니다.”


확답을 하기 힘들었다. 내선에서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었고 내 업무는 그것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무원 직무상 확답은 또 다른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반복되는 상황. 민원인의 한숨에 내 심장은 쪼그라들면서 세차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가 올라갈수록 나의 목소리는 작아졌다. 어느 순간 사무실 앞 문이 열리면 자동 반사로 심장이 달음박질해 달아났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그 아저씨인지 신경을 곤두세웠다.

늘 죄송할 준비를 한 채로 민원인을 응대했다.

민원인 모두가 그 사람 같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사람들을 상대하는 게 힘들어졌고 마음속에 벽을 세웠다.


하루는 그가 근무 시작 시간에 나타나 내일도 아니고 당장 오늘 세시까지 서류를 처리하라며 재촉했다.


“내가 가서 봤어요. 농지 맞으니까 세시까지 처리해 주세요. 이거 안 하면 계약금 날려요.”

나는 평소처럼 죄송을 눈빛과 말투로 표하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오늘까지는 힘들고요 선생님. 최대한 빨리 처리.”

“선생님이라고 하지 마세요! 듣기 싫으니까. 그리고 뭘 최대한이에요 맨날! 맨날 보는 사람끼리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 내가 가서 봤다고 농지 맞다고!!! 당장 처리해 주세요! 안 가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면사무소가 순식간에 적막에 휩싸였다.

그는 말을 마친 후 민원대 앞에 선 채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곧 처리하겠다고 정중히 말했다. 사무실 안에 있던 직원, 다른 민원인 모두가 이 상황을 듣고 봤으나 일동 침묵했다. 팀장님, 이 업무를 얼마 전까지 하던 사수, 내 옆에 앉아 있었던 동료 직원 모두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미동하지 않았다.

화가 머리로 모여 얼굴이 뜨거워졌고, 심장은 뇌까지 울려대며 쿵쿵댔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고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을 참기 위해 아랫 안쪽을 깨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본인이 정한 마감시간 안에 서류를 받아 돌아갔다. 정식 발령 2개월 만이었다. 그날 이후 소리를 치던 목소리, 강압적인 눈빛이 시도 때도 없이 떠올랐다.

분노의 대상이 필요했고 마음속에서 공격성이 자라났다. 공격 대상은 눈물을 보였던 나 자신, 민원인, 직장 동료와 상사, 세상, 끝없이 확장해 나갔다.


매일 야근 후 관사로 돌아와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화를 감각하고 소리를 지르는 순간은 오로지 꿈속에서 쫓길 때뿐이었다. 운전대를 잡고 밭으로 향할 때면 뭐라도 들이받고 싶었다. 다쳐서 사무실로 돌아가지 않고 싶었다. 많이 다치면 휴직할 수 있겠지. 혹은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겠지. 부정의 감정은 한여름 넝쿨처럼 자라나 순식간에 나의 세계를 뒤덮었다. 매일 출근하며 죽고 싶다는 생각을 되뇌었다. 그로 인해 그 사람이 손가락질받게 하고 싶었다.

유서에 이름을 명시하고 당신 때문에 죽는 거라고 써야지. 그러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려나. 아니다. 죄책감을 느낄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그날 이후 가면을 벗기로 작정한 것처럼 보였다. 출근을 하기 전부터 사무실로 전화를 해 나에게 당장 연락하라며 메시지를 남겼다. 출근길에 농지 주소를 보고 오라는 간접 지시였다. 그 말을 전하는 난처한 듯한 직원의 목소리에 얼굴에 열이 치솟았다. 민원인들의 융통성이 확장할수록 나의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향해갔다. 그럴수록 법규나 예전 문서를 검색하고 점점 방어적으로 굴며 벽을 쳐야 직성이 풀렸다.




꼬박 반년을 더 버티다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엄마에게 울면서 전화했다.


“엄마 나 그만두고 싶어. 너무 힘들어.”

“무슨 소리야 갑자기…. 하…. 왜 그래. 너만 힘든 줄 알아? 이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는 줄 아니?”

내 울음소리 때문인 건지 그만두겠다는 말 때문인 건지 엄마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다웠다.

죽고 싶은 마음,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 도망가고 싶은 마음 세 개는 정 삼각형의 꼭짓점을 이루고 내 충동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사계절을 더 견뎠지만 봄은 오지 않았다. 부정이 잠식한 무의식에 낙관은 피어나다가도 금세 시들어버렸다.

마음속에선 꺼지지 않는 불덩이만 타오르고 있었다.




특별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다 정말 죽을 거 같아서 그만뒀다. 사직 문서를 올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 메신저로 연달아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동기들이었다. 하나하나 답변을 하는 데 팀장님이 불렀다.


“그 사람 때문에 그러는 거야? 어딜 가나 그런 사람은 있어.”

“아닙니다.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을 듯해서요.”

“회사는 지옥이지만 밖은 지옥이야.”

“…네.”

“… 면장 실로 올라가 봐.”


지옥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정말 걱정되어서 그런 것일까 의도를 헤아리며 면장 실로 올라가는데 문득 2년 동안 단 한 번도 면장님과 독대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순간 내가 하던 업무가 얼마나 하찮은 거길래라는 생각과 그것도 못 버티는 스스로가 더 하찮았다. 면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나가서 뭐 하려고?”

“일단 쉬면서 운동을 좀.”

“다니면서 운동해도 되잖아. 지금은 당장 나가는 게 좋아 보여도 이제 곧 아기 낳고 결혼할 나이잖아. 결혼 안 할 거야?"

부서에 퇴직자가 있으면 고과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서일까? 면장님은 평소보다 다급한 말투였다.

“아니요. 그건 아닌ㄷ

”당장 3년 뒤면 후회해. 아니 1년 뒤면 후회해. 다시 생각해 봐. “

“괜찮습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네.”

“오늘 저녁까지 더 생각해 봐.”

“……네.”


면장실에 나와 자리로 가려는 데 평소에 나를 따뜻한 눈으로 봐주시던 민원실 팀장님이 다가왔다

“정신과 진단 잘해주는 병원 있으니까 소개해 줄게. 일단 휴직해 보는 건 어때.”

“괜찮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오니 총무과 직원이 전화 달라는 메시지가 있었다.

“옮기고 싶은 부서 있나요? 다음 인사 때 최대한 반영해 드릴게요.”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그만둔다는 소식이 퍼지자 직원들은 메시지로, 말로, 전화로 조언을 하고 걱정을 하며 동시에 호기심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관심이었다. 하루 종일 그들에게 답변했지만 그들의 궁금증을 채워주진 못했다.


‘죄송합니다’의 연속이었던 직장 생활은 ‘괜찮습니다’ 연속으로 마무리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냈던 나의 갑작스러운 사직은 막 시작된 MZ 공무원 퇴사 물결에 휩쓸리는 사람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미디어에서 노출하는 시대의 흐름에 벗어난 사람이었다.

‘갓생’을 외치며 자기 계발에 열심인 부류도 아니었고 도비 이즈 프리를 외치며 공무원 퇴사 브이로그를 찍는 경우는 더더욱 아니었으며 퇴직금으로 여행을 떠나는 욜로족도 아니었다. 오히려 드문드문 보도되는 신규 공무원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더 가까웠다.

2년의 공직생활 후 내게 남은 건 2000여 만 원이 안 되는 돈, 듬성듬성 분포한 500원 크기의 원형탈모, 마음이 동요할 때 찾아오는 홍조, 그로 인해 얼굴에 붉게 피어난 자잘한 두드러기, 사람에 대한 경계심, 바닥난 자존감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있다고 느꼈을 때 엄마에게 바랬던 건 위로와 공감이었지만 엄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걸었던 전화에서 ‘너만 힘드냐’는 말 때문에 더 이상 연락도 하지 않고 찾아가지도 않았다.

그 후로 1년 반 뒤 결국 그만뒀다는 말은 해야 할 거 같아서, 혹시나 엄마가 걱정해 주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하며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을 들으며 엄마의 반응을 예상하자 두려웠다.

역시나 엄마는 엄마였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그 후 또다시 2년. 엄마는 무슨 말을 하려고 전화했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