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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섬섬 10시간전

선생님의 임신 고백

님아 그 말을 하지 마오

4월이 끝날 무렵이 되니 낮에는 야상을 걸치지 않아도 된다.

나는 솔로를 한편 더 볼까 하다가 그냥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에 일어선다.

매일 나오는 시간보다 조금 이른 11시.


어제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공기 중에 비의 흔적이 남아있다.

걷다 보니 어김없이 왼편으로 요가원이 보인다.

처음 올려다볼 때 느꼈던 위압감은 사라지고 한낮의 햇빛만큼이나 따뜻하고 올곧다.

여기서 길 따라 쭈욱 내려가서 바다로 갈까, 아니면 올라가서 원당봉으로 갈까, 잠시 고민하다 언덕을 택한다.

어제 내리쬐지 못했던 걸 만회라도 하는 듯 햇빛이 강렬하다.

바다로 가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원당봉 안에 있는 절을 향해간다.


원당봉에 다닌 지 2개월이 되어가는 데 아직 정상에 올라간 적은 없다.

처음 보름 동안은 갈림길이 나오는 입구만 왔다 갔다 해도 심장이 터질 듯했다. 차츰 익숙해질 무렵 갈림길에서 오른쪽 길을 택하니 절이 나왔다. 절 중앙에 있는 연못을 바라보며 빙글빙글 돌았다. 그렇게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절 주위만 왔다 갔다 했다. 그리고 지난주에 드디어 원당봉 다운 원당봉을 밟았다.




날이 쨍해서 초록숲 내음이 발랄했던 날.

푹신한 야자 매트가 깔린 산책로는 나란히 둘이 걷기 힘들 정도로 좁았고 종아리가 당길 만큼 경사가 만만치 않았다. 얼마 못 가 바로 내려오고 싶었지만 가쁜 숨을 참다 보니 중간쯤으로 보이는 전망대에 다다랐다. 나무 데크로 짜인 전망대에서 동네를 내려다보았다.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기도 하고, 듬성듬성 거리를 두고 있기도 했다. 사이사이에 밭과 도로가 그들을 이어주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며 숨을 고르는 데 문득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산책로에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마주치는 것도 피하고 싶지만 마주치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이르자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내려왔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중턱 전망대까지만 왔다 갔다 했다.


오늘도 연못을 서너 바퀴는 돌았는데 평소와 다름없는 심장박동이다.

체력이 좋아진 건가? 우쭐한 마음에 중턱까지 가볼까 하며 산책로로 향한다.

맞은편 운동기구에서 동네 어르신이 허리를 이리 저리로 돌리고 있다. 옆쪽 정자엔 아저씨 한 분이 누워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까마귀의 까까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숲 안으로 들어오니 어제의 비가 채 마르지 않아 수분기 머금은 흙냄새, 촉촉한 나뭇잎 내음이 느껴진다. 짙어진 숲 냄새. 미끄러질까 발에 힘을 주고 야자수 매트만 바라보며 걷는다.


한발 한발 집중하자 콧등이 촉촉해진다. 순간 몰입을 깨는 크흠 소리가 나서 고개를 드니 아저씨 한 분이 거친 숨을 내쉬며 성큼성큼 내려오고 있다. 몸이 부딪치지 않게 매트 바깥으로 나와 지나가길 기다리는 데 아저씨가 큰소리로 “안녕하세요.”인사한다. 반사적으로 안녕하세요 대답하고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어느새 중턱.


평소보다 애쓰며 올라왔는데 숨이 덜 차다. 잠시 고민하다 전망대 앞에서 멈추지 않고 가던 방향 그대로 발을 옮긴다. 쿵쿵 울리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빠르지만 크지 않은 규칙적인 소리.

한때는 이 소리가 힘들었다. 쿵쿵 거리는 소리가 귀가 아닌 뇌를 울렸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손끝이 떨리고 턱을 꽉 깨물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문득 그때와 지금 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어제 요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앞에 한 생각을 밀어낸다.

심장이 더 빨리 내달린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기보단 회피하고 싶다.




수련 첫날 이후 차를 마신적이 없다. 차를 마시는 건 어디까지나 자유였고 권하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내심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는 선생님께서 차를 권하셨다. 자리에 가서 앉으니 선생님은 별말씀 없이 차를 따라 주셨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가, 수련 기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등록 이야기 인가 궁금했지만 조용히 차만 마셨다.

우리의 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누구도 테이블에 앉지 않고 하나 둘 일어서서 돌아가자 선생님께서 말을 꺼내셨다.


“한 달이 되어가는 데 마음은 어때요?”

몸이 아닌 마음을 묻는 선생님의 말씀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는 데 선생님이 말을 덧붙였다


“처음 왔을 때보다 기운이 따뜻해졌어요.”


“아… 감사합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누르며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하자 선생님은 환하게 미소 지으셨다.


“저 임신했어요.”


!!!??? 순간 잠깐 멍했다. 버퍼링이 걸렸다.


”!!! … 축하드려요…”


“축하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정말 기다리던 임신인데 아무에게도 말 못 하고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나는 눈만 꿈뻑이며  선생님을 바라봤다. 얼굴엔 기쁨이 가득하면서도 일말의 근심이 엿보였다.


“코로나 직전에 요가원 시작해서 타격이 심했어요.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요가원이라 회원 모집이 어렵지 않았고 시작 2개월 만에 자리 잡나 싶었는데 바로 코로나가 터졌어요. 초반엔 그러려니 했는데 상황이 심각해지더라고요. 인원 제한 일 때는 하루 걸러 하루 아무도 안 오기도 하고, 강제로 문을 닫기도 하고, 석 달 정도는 회원이 없어 휴강했어요. 그래도 혼자 매일 나와서 쓸고 닦고 수련하고 공부했어요. 이왕 시작한 거 꾸역꾸역 뭐라도 해야 했죠.”

얘기를 들으며 왜 내게 이런 말씀을 하시나 궁금증이 차올랐다.


“위드 코로나 되면서 다행히 동네분들이 다시 찾아주셨어요. 감사한 일이죠. 이렇게 안정화된 지는 6개월도 채 안 됐어요.

근데 그렇게 갖고 싶을 때는 오지 않던 아기가 일에 집중할 때가 되니 왔네요. 기쁜 일인데 온전히 기쁘지 않아서 아이한테도 미안해요.”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유진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니까 놀라셨죠?“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라는 속마음이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아.. 네… 그냥… 조금…”

아니 전혀 차분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데 선생님께서 빠르게 치고 들어왔다.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부탁’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들어 선생님의 눈을 마주 봤다.


“딱 10개월 요가원을 맡아주실 수 있나요?”




원래였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하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이 제시한 조건은 나에게 마침맞았다.

놀라서 대답도 못하고 눈만 돌리던 나에게 선생님은 천천히 생각해 보고 한 달 이내에만 결정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수련은 계속 나오고 결정했을 때 수강료를 계산하라고 하시며 도망가지 말고 다음 주 월요일에 평소처럼 꼭 나오라고.


조건은 과분했다

3개월 무료 수강, 수련하는 기간 동안 숙식 제공, 한 달 월급 200만 원

다가오는 7월 말부터 내년 4월까지 평일 오전 오후 1시간씩 수련지도 및 정리 정돈

화장실 청소와 내부 청소는 주 3회 전문가에게 맡길 예정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 수중에 남은 돈 760만 원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4개월에서 5개월 정도면 돈은 바닥나겠지. 죽기로 한 결심도 결론에 도달하겠지.


죽음???

죽음??????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나를 지배했던 단어가 생경하다.

요즘엔 죽을 생각이 아닌 살 생각을 하고 있다.

밥솥을 사야 하나. 돈을 벌어야 하나. 엄마한테 연락해야 하나…


죽을 용기가 없어 스스로가 미웠었는데 그 용기 없음이 나를 살렸다는 생각이 든다.



삶으로 다가간다면 지금 당장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눈앞에 있다.

그저 밟기만 하면 될 뿐 망설일 필요가 없다.


심장이 콩콩 거린다.

쿵쿵 내달리는 게 아닌 콩콩 튀어 오르는 느낌


내가 할 수 있을까?

설렜던 마음도 잠시, 늘 그랬던 것처럼 해내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체력이 이렇게 바닥인데, 복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물구나무서기도 힘든데, 물구나무서기? 제대로 서기도 힘든데??? 머리엔 안개가 가득한데, 온몸엔 지방이 가득한데.

무엇보다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두려운데…


생각에 꼬리를 물다 보니 좁았던 산책로가 넓어졌다.

사위가 환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정상이다.



안녕하세요! 섬섬입니다

7화가 되어서야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어요.

첫 소설이라 어색함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서히 변해갈 유진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쓸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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