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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ulwoong Aug 25. 2017

정의할 수 없는 젊음에 대해 '쓰다'

영화 <Youth>


인간은 자신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자신을 투영시켜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영화는 타인으로서 기능한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안에 감독이 전하고 싶은 것을 모아 놓은 경험의 집합체와 같다. 이것은 하나의 생명체와 같이 느껴진다. 


영화의 감독인 파울로 소렌티노는 이탈리아 사람이다. 소렌티노의 최근 연출작 <그레이트 뷰티>의 주인공 역시 65세 노인이다. 이 노인은 부와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헛헛함을 느끼며 젊은 날에 대해 반추하는 노인을 그리고 있다. 






영화 <Youth> 역시 이런 맥락에 이어져서 탄생한 영화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Youth>는 훨씬 어렵게 대중과 소통한다. 연출이나 편집 영상의 호흡까지 대중에게 친절하지 못하다. 하지만 사람의 늙음과 젊음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만큼 감독은 "이 만큼 어려운 이야기야"라는 태도로 전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Youth>는 은퇴한 작곡가 프레드를 중심으로 4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영화는 각각의 인물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 하지만 결국 '젊음'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젊음'을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인간의 삶에 대하여 질문은 던진다.




프레드의 '젊음'


프레드는 은퇴한 유명한 작곡가로, 젊은 시절 오직 음악만을 바라보고 걸어왔다. 영화에서는 프레드가 음악적 실험을 위해 동성연애까지 한 것으로 보아 그의 음악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오직 음악만을 바라본 프레드는 가족을 등한시한다. 프레드는 대중에게 인정받았고, 명예를 얻는다. 하지만 그는 가족을 잃었다. 음악만을 사랑하는 프레드를 사랑하는 아내는 그를 위해서 헌신하다가 숨을 거두고, 프레드의 딸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가 아는 건 음악뿐이었어. 음악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이해하는 건 너의 어머니의 몫이겠지."


프레드의 젊음은 오직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의 음악이 절정에 올라서고, 나이 들어 내려오는 시기가 되었을 때 그의 주변은 공허로 가득 차고, 프레드는 하나 둘씩 감정을 잃어간다. 영화에서 프레드의 절친인 '믹'은 영화감독으로 프레드와 닮았지만, 대조되는 캐릭터로 분류된다. 프레드는 감정의 불필요성에 역설한다면, 믹은 감정의 필요성에 역설한다. 프레드가 감정을 잃어가는 계기는 아마 그의 아내 부재에서 시작된게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프레드의 대표곡인 <심플 송>의 지휘를 여왕이 문의하는데, 프레드는 계속 개인적인 이유로 거절한다. 비서가 끝까지 이유를 추궁하자, <심플 송>은 아내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음악이라고 서글프게 이유를 말한다. 이 장면에서 프레드의 딸은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풀고, 프레드의 아내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다.


영화에서 '믹'과 '프레드'가 주로 나누는 이야기 중에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첫사랑에 대한 욕구는 무감각해진 프레드의 얼마 남지 않은 감정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두 노인은 자신들의 기억이 모호해지는 것에 대해서 강박으로 느낄정도로 '첫사랑'에 집착한다. 개인적으로는 '첫사랑'에 대한 기억은 그들의 젊음에 대한 기억의 지표이며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젊음'을 잃는 것과 동급으로 취부 되는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영화에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둘은 젊은 시절로 빙의한 듯 열의에 차있다. 그리고 대조적으로 '소변'의 유무를 묻는 것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은 그들의 '늙음'을 대표하는 주제다.




믹의 '젊음'


프레드가 음악이라면, 믹은 유명한 영화감독이다. 프레드는 은퇴하고 내려온 상태라면, 믹은 은퇴를 준비하는, 영화에서 표현된 단어로 '유언장'과 같은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믹이 젊은 스텝들과 논의하는 장면은 그가 아직도 '젊음'에 속해 있다는 것을 비유한다. (프레드는 대조적으로 마사지를 받거나 편하게 휴식을 취하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노후의 삶의 모습을 자주 보여준다.)


"젊은 사람들은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보고,

늙은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조차 벌리 있는 것으로 본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으로, Youth의 슬로건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나는 이것을 '시간'을 대하는 태도로 정의한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요'와 같이 매우 진취적인 성격을 지닌다. 젊음은 항상 무엇을 향해 나아가려 하고, 미래에 대해 준비하고 계획한다. 이것은 미래를 현실로 끌고 와 동일시하는 태도다. 반대로 나이 든 노인은 남은 삶이 자신이 겪었던 과거의 경험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현실이 과거의 파편처럼 느껴지게 된다. 현실을 자신의 과거에 투영하기 때문에 회상은 가능하나 경험은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사소해져 버린다.


믹은 브랜다 모렐이라는 자신의 영화 인생을 함께한 여배우와 함께 유작을 함께하려 한다. 믹은 한치의 의심도 없이 모렐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년는 거절했고, 브랜다의 거절에서 너무나 날카로운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녀에게 배신당하며 믹은 큰 충격에 빠진다. 브랜다와의 만남으로 믹은 자신의 '젊음'이 모조리 배신당하는 경험을 한다. 감정에 충실했던 믹은 변해버린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감정에 압도당해 스스로 목숨을 끓어버리고 만다. (유언장이라는 장치가 어느 정도 믹의 끝을 예견 하고 있었다.)




레나의 '젊음'


프레드이 딸인 레나는 앞의 두 사람에 비해서는 젊은 사람이다. 하지만 '젊음'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레나는 아버지인 프레드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과거 음악에만 빠져있는 아버지는 가족을 챙기지 않았고, 어머니에게만 의지해 살아왔다. 가족을 등한시하는 아버지 프레드에게 무조건적으로 헌신하는 어머니를 레나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영화에서 레나와 프레드와의 대화에서 가끔씩 등장하는 농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레나는 약혼자에게 파혼당한다. 그것도 성관계를 잘 못한다는 황당한 이유로 말이다. 레나는 그 사건으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때 암벽 등반가가 레나에게 말을 걸면서, 그 둘의 새로운 관계가 형성된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한 레나에게 암벽 등반가는 새로운 시작으로 기능한다.(시각적인 언어로 레나는 벼랑 끝에서 떨어졌고, 암병 등반가는 그런 레나를 다시 오르게 도와줄 사람이다.)




지미 트리의 '젊음'

지미 트리는 유명 배우로 사람들이 자신을 과거의 대표작에 대한 이미지로만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을 갖고 있다. 그의 '젊음'은 과거의 성공이며, 그 성공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미 트리는 자신에게 명예를 안겨준 그 성공에 대한 반감으로 새로운 시도를 준비하는데, '히틀러'를 연기하는 것(금기를 부시는 것)으로 자신을 새로운 시작선에 위치시킨다.




정리하며


프레드와 믹이 '늙음에서 바라보는 젊음'이라면 레나와 지미 트리는 '젊음 안에서 바라보는 젊음'이다. '젊음'이라는 말이 꼭 나이가 젊다를 대표할 수는 없다. '젊음'은 상대적인 것이며, 어떤 기준을 세우고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영화의 마지막에 '믹'의 자살로 프레드는 스스로가 정하고 있던 삶의 규칙을 변화시키며 나아간다. 영화에서 '늙음'을 대표하는 인물의 진보적인 행동과 도전은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늙음'과 '젊음'은 나이라는 것으로 간단히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 개념은 스스로가 가슴 안에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열정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의 유무에 따라서 자신의 '젊음'은 정의되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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