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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기 Mar 31. 2016

9화. 거제도에는 너와 걷고 싶은 길이 있다.

[길 위에서 너에게 쓰는 편지]

안녕? 나야. 우리 오랜만이다 편지로 인사하는 거 그치? 같이 학교 다닐 때는 네게 손 편지 자주 썼었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기회가 자주 찾아와 주지를 않네. 오늘 편지를 쓴 이유는 예전에 네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확인해보려구. 나 기억력 좋은 거 알지?    


기억해? 내가 언젠가 너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던 말. 너에게만 말했으니 너와 나만의 비밀이네. 네 꿈은 뭐였더라? 맞다 음악! 그래, 곡을 쓰고 싶다고 했었어 너는. 이루마를 좋아했던 너는 좋아했던 노 골라 나만을  CD를 선물해줬었지. 그거 아직 거제도 집, 내 책상 서랍 두 번째 장에 있을 거야.

 

너는 워낙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주가 있었고, 애들 사이에서 절대음감으로 통했지. 나는 네가 연주해줬던 피아노 소리가 참 좋았어. 너도 알다시피 내가 음악 쪽으로는 재주가 없잖아. 음악시간에 청음 테스트를 앞두고 나 도와주려고 네가 무진장 노력했는데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게 만들었지 내가. 하하




너는 내가 왜 작가가 되고 싶었는지 알아?   


나는 어렸을 때 혼자인 시간이 많았어. 우리 부모님 많이 바쁘셨잖아.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우리 언니가 학교서 돌아오기 전까지 주로 혼자 집을 지키곤 했어. 다행히 외롭거나 무섭진 않았어. 우리 엄마가 말해줬는데, 엄마가 한 번씩 집에 일찍 들어온 날이면 혼자 있던 내가 집안에 물건들을 죄다 꺼내 걔네들한테 이름을 붙이고, 1인 다역으로 역할극을 하더라는 거야. 정말 웃겼대.


나도 기억나는 그 날은 ‘화장품 나라의 이야기’였어. 엄마 화장대에 있던 화장품들을 모두 꺼내서 화장품 나라의 왕과 왕비, 신하와 군인, 백성들 이렇게 인물을 정해놓고 돌아가면서 대사를 치고 그랬어. 뭐가 됐든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개수만 맞으면 그 물건들이 그 날의 주인공인 놀이였지. 그때부터였던 거 같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던 거. 내가 본능적으로 발견한 재주가 있다면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것 같아.  




너랑 내가 10대 초반에 만나 지금까지, 우리는 꽤 오랫동안 단짝이었지. 네 덕분에 나는 즐겁지 않았던 적이 없었어. 언제였더라? 싸이가 '연예인'이라는 노래를 방송에 나와 부른 후, 네가 나를 웃겨 줄 때마다 너는 이 노래를 불렀지.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항상 즐겁게 해줄게요
연기와 노래 코미디까지 다 해줄게
그대의 연예인이 되어 평생을 웃게 해줄게요
언제나 처음 같은 마음으로

고마웠어 친구야.






어른이 되고 고향을 떠난 뒤에도 우리는 만날 때마다 고향 이야기를 했지. 우리의 첫사랑이자 각자의 흑역사로 남은 그 남자들은 뭐하고 있는지, 야자 때마다 학교 구관 2층 문과 연결된 바깥 통로에 앉아 우리의 미래를 고민했던 시간들(너 또 그 시간에 공부를 했다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고 얘기할 거지?), 친구들 이야기 등 했던 얘기 또 하고 알고 있는 얘기 또 해도 늘 재밌었어.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너한테 그런 말을 했었지?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거제도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너랑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쓴 거제도 이야기를 읽고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너는 좋은 생각이라며 나를 응원해주었지.


그러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삶의 모양에 맞게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을 때쯤, 나는 나를 작가라 불러주는 공간을 만났어. 그곳은 그때 내가 너에게 했던 약속을 떠오르게 해주었지.





너도 알다시피 예전에 우리가 살던 고향과 지금의 거제도는 많이 바뀌었어. 거제도에 가끔씩 내려가는 나와 그곳에서 오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변화의 속도를 느끼는 정도가 많이 다른가 봐. 나는 그런대로 익숙해져 보려고 해. 너도 알지? 나 긍정적으로 사는 거.


대신 우리가 걸었던 길은 그대로 남아있어. 그 길 끝에 우리가 가던 학교, 해안도로, 목욕탕, 그리고 산봉우리까지 여전해. 아쉽지만 여기저기 개발되느라 없어지거나 변한 곳도 많아. 네가 슬퍼할까 봐 자세히 말해진 않을게.


그 길 위에 그곳이 존재했다는 걸 나만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어서 다행이야. 나는 그 길을 걷고 있던 나를 기억해주는 너를 위해, 이미 그 길을 아는 누군가를 위해 그리고 앞으로 그 길을 걸을 그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쓰고 싶어.

 

고마운 나의 친구야,

거제도에는 너와 같이 걷고 싶은 길이 있단다.  





'거제도 길을 이야기하다'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이번 글은 브런치북 프로젝트에 맞춰서 짧은 시간이나마 고향을 다녀와 글을 써보았어요. 거제도에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면서 제가 잘 아는 곳을 쓰려다 보니 구미가 확 당기는 길이 있었는지 모르겠네요.
앞으로도 고향을 다녀올 때마다 글을 쓸게요. 거제도가 고향인 저에게 그곳은 길 말고도 사람, 건물, 추억 등 이야기가 많답니다. 좋은 주제가 생각나는 대로 다시 글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D  


<거제도 길을 이야기하다> 다시보기
0화. 거제도 길을 걷다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
1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길]이 있다.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7
2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해안길]이 있다. / 해안도로를 따라 동백, 수선화 그리고 벚꽃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0
3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오프로드]가 있다. / 거제 8경, 한국의 아름다운 길, 여차~홍포 해안도로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2
4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목욕탕 길]이 있다. / 우정테스트, 치즈떡볶이, 동네 목욕탕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1
5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바다항구]가 있다. / Dear, my hometown 나의 오래된 동네, 장승포항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3
6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갯벌길]이 있다. / 갯벌, 조카와의 체험, 다대마을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4
7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미로味路]가 있다. / 봄에 나는 멸치 - 봄멸 그리고 외포항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5
8화. 거제도에는 같이 걷고 싶은 [봄 꽃길]이 있다. / 축제를 앞둔 대금산 진달래꽃 https://brunch.co.kr/@wisdomandgrace/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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