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별이 되다
매일 밤.
우리 집 창문은 빨간색으로 물들었고,
사람들은 우리 동네를 '옐로 하우스'라고 불렀다.
"엄마, 잠이 안 와..."
"이리 와... 엄마가 안아줄게~"
"나도!"
"은수도 이리 와~!"
잠든 줄 알았던 은수가 엄마 반대편에서 대뜸 말해서 깜짝 놀랐다. 나와 은수는 엄마 품에 얼굴을 묻고 엄마 가슴을 한쪽씩 만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모르겠지만 이미 엄마의 가슴은 우리끼리 자기 것을 정해 놓았고 그게 우리가 매일 자는 자리가 되었다.
난 오른쪽 가슴을.
은수는 왼쪽 가슴을.
엄마의 가슴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웠고
엄마의 품은 세상에 가장 포근했고
엄마의 머리카락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향기가 났다.
아줌마와 남자들이 실랑이하는 소리는 우리를 매일 밤 잠 못 들게 했다. 방이 좁아 침대를 창문 쪽으로 딱 붙여서 그런지 밖에 소리가 더 잘 들렸다. 술 취한 남자들은 연신 욕을 해댔고 아줌마들은 그런 남자들을 붙잡고 소리쳤다.
"삼촌들! 애들 끝내줘~놀다가~~"
한동안 밤마다 창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잠을 설쳤지만 몇 달이 지나니 그 소리마저도 익숙해졌다. 지금까지 모든 게 그랬다. 처음에는 무섭고 창피하고 싫었던 것들도 시간이 좀 지나면 나름 괜찮아졌다.
모든 건 익숙해졌다.
그리고 익숙해져야 했다.
우리가 오기 전 이곳은 할머니의 일터였다.
큰 대로 사이로 양쪽으로 이어져 있는 주황색 빌딩에는 번호들이 간판처럼 붙어 있었다. 지나가다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 할머니를 19호 할머니라고 불렀다. 자연스럽게 난 19호 할머니 손자가 됐다. 할머니는 낮 동안 19호에 있는 방들을 청소하고 저녁에는 음식을 한다고 했다. 왜 할머니가 여기서 일하는지는 몰랐지만 무릎을 살짝 절뚝거리는 걸 보면 전처럼 혼자 포장마차를 하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도 여전히 외로워 보였다.
이곳에 어른들은 나이와 생김새는 달라도 하는 일은 비슷해 보였다.
각기 다른 간판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아서 취객에게 소리치는 아줌마들
건물의 유리창 안에서 한복을 입고 멍하니 밖을 쳐다보며 앉아 있는 누나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가게 주변을 왔다 갔다 하는 몸에 그림이 그려진 아저씨들
전과는 다른 동네 풍경에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어느덧 이곳도 많이 익숙해졌다. 학교를 마치고 빌딩이 사이로 걸어들어가면 지나가다 얼굴을 익힌 누나들이 내 손을 잡고 세탁소 옆 작은 구멍가게로 데려가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또 할머니 옆 가게 17호 아줌마를 나와 은수를 유독 귀여워했다. 어제 장사하고 남은 과일이라며 독쟁이 시장에서 그렇게 먹고 싶었던 바나나도 하나씩 건네 주곤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누나들에게 욕을 해주기도 했다.
"아고~꼬마야~!
어린애가 벌써 이런 데 오면 안 되지! 히히히"
"이년이 애한테 못하는 소리도 없네! 빨리 꺼져!"
근데
이미 나도 알고 있었다.
이런 데가 뭐 하는 곳인지.
집에 불이 나서 우리는 한동안은 근처 여인숙에서 지냈다. 건물 주인에게는 할머니가 월세에 더해서 1년 동안 나눠서 갚기로 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 있다가 우리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곳도 익숙해졌는지 다시 돌아오니 마음이 편했다. 여기도 우리 집이었으니까.
"야. 너희들! 어디서 왔어?"
"어? 우리는 독쟁이 시장 근처에서..."
"거기가 어디래? 암튼 같이 놀래?"
"난 10살인데 넌 몇 살이야?"
"나도 10살인데! 신기하다! 하하하"
작은 체구에 단발머리를 한 여자애가 한두 살 정도 어려 보이는 남자아이와 함께 집에 들어가려던 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 이름은 김지선이고 옆에 있는 동생인 김지만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들을 이곳에서 가장 큰 빌딩인 2호에 산다고 했다. 2호는 동네 중심에 가장 큰 건물이었다. 1층도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가장 넓었다.
이곳에서도 아이들은 자랐다.
마침 은수도 지만이랑 동갑이어서 그때부터 우리는 매일 같이 놀았다. 사실 이 동네에 사는 애들은 우리 넷이 전부였다. 근데 전에 동네에서는 애들도 많아서 제기차기, 숨바꼭질, 망까기 같이 안 해본 놀이가 없었는데 지선이와 지만이는 좀 달랐다. 뛰거나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넷이 앉아서 만화 얘기를 하거나 동그란 딱지놀이를 하는 게 다였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다.
"야. 너 노래 잘 해?"
"응? 못하지는 않지.. 왜?"
"노래 한번 불러봐!"
"뭐? 지금? 여기서?"
"응"
똘망똘망한 지선이의 눈이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난 가수 조정현을 좋아했다. 오른쪽으로 넘긴 머리와 잘생긴 얼굴로 이미 가요톱텐 1위를 몇 번을 했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 특히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는 내 18번이었다. 난 밝은 노래보다 슬픈 노래가 좋았다. 목을 가다듬고 전봇대에 살짝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지선이가 눈을 감았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난 끝까지 불렀다.
"야! 좀 하는데? 난 노래 잘하는 남자가 좋더라"
"어?"
"손 좀 줘봐!"
"왜?..."
갑자기 지선이가 내 손을 잡았다. 순간 얼굴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아직 어렸지만 나도 남자였다. 그날부터 지선이를 보면 얼굴이 빨개지고 얘기를 잘 못했다. 이상하게 마주치는 게 어색해서 맞은편에서 지선이가 보이면 몰래 숨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며칠이 지나서 지만이가 은수에게 말을 전했다. 지선이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저녁 7시에 18호 옆 골목 전봇대로 오라고 했다.
"왔어?"
"웅"
"나 이제 곧 다른 데로 간대..."
"어? 어디로?"
"몰라... 엄마가 이제 여기 있으면 안 된대..."
"언제 가는데?..."
"내일..."
"어?..."
다음날 아침 2호 앞에 작은 봉고차 하나가 서 있었고 지선이랑 지만이는 그렇게 차에 올랐다. 그리고 차 뒤로 보이는 창으로 우리는 계속 보고 있었다.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지선이 남매가 떠나고 다시 이 동네에 아이는 나와 은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