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처럼 강남 쪽으로 갔지. 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보았어. 왠지 익숙하지만 낯선 그 풍경이 생경했어. 그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지.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거기서 세월을 지각했기 때문일 거야. 아휴 그때 내가 저걸 사놨으면? 하는 이런 푸념과 웃음 속에는 어떤 무의미들이 헤엄치고 있었지. 상실과 한계 속에서, 지금이라는 순간에서 과거를 보는 오만의 관조와 경멸이 동시에 공존하는 형이의 이중성에서 현재를 자족하는 어떤 안도감이 함께 하는 지나가는 여행자의 여유로운 거리감을 느끼기 때문일 거야. 그때의 욕망에 거리를 두고 관조할 수 있는 일종의 허영이 주는 충족감. 그것이 없다면 모든 지난날은 떠올릴 가치가 없을 거야. 허영이 충족되기에 지난날의 상기는 가치를 생성하는 것일 테지. 상실이 주는 허무적 고통에 비례하여 허영은 존재하는 것일 테지. 어쩌면 니체가 허영을 말할 때, 허영에게 가치가 부여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지점일 것일지도. 그러니 허영은 현재에 있지 않고 과거에 있으며, 과거라는 한계에 대한 보상에 기반하고 있을 테지. 아마도 허영심 없는 인간은 없을 것이므로, 결여를 이미 하고 있고 미지의 충족을 원하는 인간에게 허영심은 필수일 것이야. 허영은 인간의 피부와 같은 거야. 그 피막의 보호 없이 인간이 '한계'를 직면할 수는 없어. 이 한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의 '한계'를 의미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지금(uyn)은 한계이다. 지금은 어떤 시간의 시작이면서 다른 시간의 끝이다} 그때 나는 이 말이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어. 인간은 그 자신의 한계를 보는 순간에만, 그 한계 너머를 상상하기 시작하니까 말이야. 이것이 바로 인간이 꿈을 꿀 수 있는 원인일 테지.꿈이자 상상은 무엇인가를 이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 지점에서 허영과 과잉에 의한 생산이 태어나는 것일 테지. 또한 바로 이러한 특성이야 말로 예술을 이해하는 태도이기도 하겠지. 예술은 본질적으로 허영이며 과잉인 이유가 바로 '한계'를 직감하는 순간에 그 너머를 보기 때문이겠지. 인간이 극한까지 치닫는 이유이기도 할 거야. 의도적으로 한계에 직면하여 그 사이 시간을 열 속셈인 것이지. 그러니 또 예술은 작가의 의도 그 자체라고 말해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