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혼자서 쓰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아니다, 읽는 것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에 이런 만감이 교차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왜 그리 힘든 고립에 그 자신을 가두는 것일까?
그것이 어쩌면 그 자신의 운명이기 때문일까?
니체는 정작 그 자신은 그토록 많은 글을 쓰면서도, 후세인들에게는 학문적 방식에 고립되지 말라고 한다. 글은 직관적으로 쓸 때 힘이 들지 않는다. 일사천리로 써지기 때문이다. 대신 그때의 그 자신은 망각된다. 하나의 세계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때로는 오히려 건강이 상하는 것이다.
어떤 모순이 있다. 학자적 파고듦의 고립적 글쓰기와 직관적인 빠져듦의 글쓰기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그 간극은 메꿀 수 없다.
니체는 삶을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일상은 따분하기 그지없고 여유를 즐길라치면 게으름으로 흐르거나 나태함의 무기력으로 치닫기 일쑤다.
결국 일상을 살려면 비일상을 끌어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 자신의 세계일 것이다. 사람은 모두 그 자신의 세계를 만들려고 무엇인가를 행한다.
이를테면 나는 내 세계를 구축하려 오늘도 글을 쓴다. 아마도 나는 이제 작가가 되려나 보다. 작가의 세계, 이것이 내 세계가 될 것이다. 그냥 일상이 아닌 작가의 일상을 사는 것이 나의 비일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일상에서 비일상은 또 무엇일까? 아마도 역으로 일상이 될 것이다. 그때 그 일상은 낯설게 다가올 것이다. 일상을 새롭게 사는 방법은 거꾸로 보면 된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지만 일상을 비일상으로 사는 것이다.
밥 하는 일, 김치를 담그는 일, 청소하는 일이 오히려 그때 비일상이 된다.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글을 쓰는 것은 내 일상이다. 돌아보면 그렇게 살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문득 이런 생각에 나는 갑자기 그랬구나! 한다!
내 몸은 익숙해진 것에 내 관념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못한 그런 것들. 이제 다시 제대로 보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뒤바꿈은 '한강'의 기적(기적이라 쓰고 열정이라고 읽자)이 나에게 새삼 알려준 것들이다.
낭독 방학이 끝나고 낭독을 재개하였다. 나는 어제부터 목감기가 왔다. 낭독에 있어서 목은 소중하다. 다음 낭독까지 목관리를 잘해야 한다. 여름 내내 어떤 신체적 불쾌감을 일으키는 찌뿌둥함은 내 안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혼돈의 시간들, 뭔가를 내 안에서 정돈해 내는 것은 생각보다 체력을 더 많이 요구한다. 니체는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은 제대로 된 식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신에너지를 많이 쓰는 이들은 뇌가 그만큼 에너지를 많이 쓴다. 책을 몇 시간 앉아서 읽거나 글을 쓰다 보면, 초췌해진 내 모습을 거울 속에서 본다. 그렇기에 니체는 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떤 책들은 혼자서 읽으면 그 안에 젖거나 빠지거나 또는 난해해서 읽기의 진도를 빼지 못하고 멈추거나 거기에 머물러 있게 된다.
나에게도 그런 책들이 많이 있다. 이런 증상은 영화보다 문학이 더 그러하다. 어쩌면 철학책도 함께 읽을 때 그나마 전체적인 읽기로서 그 철학의 향방을 파악할 수 있듯이, 문학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도스토옙스키의 두꺼운 소설 <악령>도 그러하고, 또 내용을 혼자 소화하기 어려운 문학들은 같이 읽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공포와 두려움과 압도감이 상쇄되기 때문이다. 책은 일단 읽어야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읽었다는 것은 그 자신과 만난 것이다. 만났기에 거기서 새로운 생성이 생겨난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분위기 잡힘이 있다. 그렇게 하나의 감성이 솟아난다. 감성 만들기이다.
감성은 즐거움만 감성이 아니다. 공포에서 비롯되는 불안과 상처와 흔적들의 총체다. 책은 그 자신 안을 건드린다. 서정은 바로 그러한 것들의 총체인 것이다. 이 감성을 어떻게 통제하고 다듬어 이야기로 풀어내는가? 에 따라 그 글의 향방이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니 읽기와 쓰기의 훈련은 고단한 작업일 수도 있다. 우울을 달고 살 수도 있다. 혼자서 뭔가를 한다는 그 자체에서 인간은 고립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또 인간은 그렇게 한다. 단독자로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의 세계란 바로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또 이렇게 말했다. 모든 예술은 과정에 필요한 것이라고. 고통의 시간에 예술이 없었다면 어떻게 인간이 그 시간을 견디겠는가!라고 말이다. 그 자신이 만드는 세계와 이미 만들어진 세계는 서로 드나듦의 통로가 있다.
예술은 그 자신이 끌어당기거나 그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들에게 매혹당하는 것이다. 사물은 인간은 유혹한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많이 사용되는 기법일 것이다. 세이렌의 목소리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매혹당하면 치러야 할 대가들이 생겨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살아왔다. 대신 선택에 대한 부분 역시 강화되어 왔다.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선택의 결과다. 지금 여기에 있는 그 자신은 그 자신의 총체로서의 최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것을 받아들임만이 하심이자 또는 겸허한 수용이 될 것이다. 그럴 때 자유가 생겨난다. 족쇄가 풀어지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