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공감능력은 그 자신이 겪어보지 않았어도
그 환경에 대한 트라우마를 체험하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공감능력이야말로 인간에게 고통을 증폭시키는 기제이지 않을까?
인간을 더 취약하게 만든다.
그렇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인간을 약하게 만든다.
이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런데 과연 그런가?
인간은 공감능력 덕분에 자기의 고통을 공동체로 전이시킨다. 공동체로 떠넘기는 것이다. 왜일까? 더 크게 키워 끝내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고통에 머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고통을 느끼는 그 자체는 문제를 키워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공동체에 문제를 위임하는 절차이기도 하다.
인간은 학습능력에 의해 역사를 공부하고 역사를 현재로 끌어오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역사를 실질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학습된 역사일지라도 인간은 그 역사의 숨결을 느낀다. 역사를 느끼는 그것에 의하여 트라우마적 상처도 같이 상속받는다. 고통을 느낀다. 그 고통은 해소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운동'의 기본 형태는 공동체로 고통을 위임하는 형태이다. 피 내림으로 이어지는 유전자에는 그것이 각인되어 있다. 왜 각인되는 것일까? 고통에 의해서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각인되는 것이다. 가장 근래의 고통은 가장 먼 조상의 고통과도 통한다. 신체에 각인되는 고통은 형벌로부터 분리된 만연된 폭력에서부터 그리고 심리적인 것으로까지 폐부 깊숙하게 침투한다. 인간의 신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모두 신체가 그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조상의 신체와 우리의 신체는 같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이렇게 사건을 키우는 것에 그 의미가 있다. 인간의 공감능력은 학습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인간의 감정은 계속 학습되고 있는 중이다. 감정은 제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태어났을 때의 감정보다 그 후의 감정은 더 커져 있다. 그 감정을 연마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크나큰 일이다. 인간의 트라우마적 크기도 그에 비례하는지도 모른다. 알아서 고통스러운 것이지 몰라서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뭔가를 감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그 원인에 대한 부재에 의하여 인간은 회피하기도 하지만, 공감능력은 다시 그것에게 다가가게 만든다. 공감능력과 고통은 두 얼굴을 가진 한 사람과 같다.
두 가지 길이 있다. 몰라서 모르고 넘어가는 길과, 알아버려서 부단하게 문제 해결로의 움직임으로 나아가는 길.
무엇이, 어느 방향이 인간의 본래적 실존으로 열려 있는 길인가?
이 질문이 툭, 던져져 있다. 마치 인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