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쓰고 보니 후덜덜하다. 문장만 그렇고 사실 보는 동안 나는 인간은 얼마나 많은 것에 매여서 스스로를 속박하고 사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에 대해 생각해 보았지만, 결국 너무 뻔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속 가능하지 않게 만드는 요인들과 그 요인들을 용납하거나 혹은 관습처럼 추인하는 삶의 방식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학습되어야만 그 자신의 성능을 유지하고 사는 것 같다. 오늘의 무거움을 떨쳐낼 수 있는 것은 그 무게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계획을 이행하는 것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힘을 받는다. 멈춤을 추인하는 것보다는 통로를 만들어 주는 것만이 인간이 그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인지도 모르겠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을 정주행 했다. 고지와 심판의 날은 시연됨으로 인해서 하나의 공연이 되어 버렸다. 지옥의 사자 삼인방은 럭비 선수 같기도 하고 혹은 그리스 신화의 거인들 같기도 하고 포즈는 사찰의 사천왕 포즈 같기도 하고, 무언가 이색적이어서 어색함도 있지만 신선하다는 생각을 했다. 초자연적 현상이 차원의 거울 문을 이용하여 등장한다. 그 문은 땅이든 지하든 물속이든 어디에나 만들어지는 문이다. 그렇게 정확하게 고지된 것이 얼마나 공포인지 유아인은 정진수라는 인물을 통하여 잘 드러내었다고 여긴다. 정진수라는 인물은 ‘유아인’을 위해 만들어진 인물처럼 여겨졌다. 차원의 문이 있다면 그 차원을 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드라마가 거기까지 진행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다양한 소재들이 등장할 것 같은 예감을 받는다.
‘김현주’의 액션 씬은 신선했다. 변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은 자기 몸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사로 변신한 극 중 민혜진 역의 김현주는 무게 추를 만드는 역할이다. 대칭을 만들어서 균형을 회복하는 듯하다. 그리고 덜 대중적인 배우들이 등장하는 것 역시 신선하다. 그래서 좀 더 사실적인 느낌이다. 극에 몰입되는 이유, 바로 현실에서 지금 벌어지는 사건이라고 여겨지게 만드는 것, 현실과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것에 이러한 요소도 한몫하는 것일 것이다.
한편으론 촬영 장소들이 후미지고 낡은 건물과 집들이 나오는데, 영화를 찍기 위해서는 이 르와르적인 느낌이 나는 오래된 건물들을 재건축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영화는 아니 모든 철학적 소재는 과거를 잘 쓴다. ‘쓴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과거가 어떻게 기억되고 재생되어 돌아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에서 그 작품의 몰입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은 분명 발생할 시점을 겨냥하고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단지 그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모른다는 것뿐. 정진수는 고시를 받았고 이십 년의 시간만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그 자신 이후의 세상을 설계했다. 그런데 그도 몰랐던 것이 있었다고 예고한다. 하긴 알았다면 이십 년을 공포와 싸우면서 보내지는 않았겠지.
요즘 들어 넷플릭스에 입점한 한국 영화나 드라마들은 소재 제한에서 해방된 것처럼 어떤 빗장을 부수고 뛰쳐나온 듯하다. 영화나 드라마도 웹툰이라는 장르가 소재를 확장한 영향과 궤를 같이하는 것 같다. 어디선가 소재 확장을 넘어서면 어디선가도 더불어 확장된다. 이것은 문화 연쇄 효과일까.
지옥은 오징어 게임이 더 직접적으로 확 현실로 밀고 들어온 느낌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은 분명 아닐진대 연달아 이렇게 비슷한 소재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어떤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 역시 한국의 드라마이기 때문에 서로 공유하는 어떤 중심적 테마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시대성이라는 것이지 않을까. 균형과 불균형, 대칭과 비대칭, 가시적인 세계와 비가시적인 세계의 격돌은 은폐된 이면을 들춰내게 된다. 한국사회는 그간의 온갖 뉴스들을 생산해 낸 결과 이야기 소재가 무한광산급인 듯하다. 게다가 역사적 소재 또한 아직 미탐험된 곳이 많다. 잠재성이 풍부한 노다지급 광산인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 그 방식을 골몰하며 연구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쓴다'라는 의미는 바로 그걸 의미한다. 그리고 지금 격발 되는 중일 것이다. 뇌관이 건드려진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러니 마치 좀비들이 몰려오는 장면이 연상된다. 그건 바로 시뮬라크르의 또 하나의 양태였는지도 모르겠다. 좀비의 반격은 진화하여 문화 대반격으로 방향 선회된 느낌이다. 그러니까 좀비라는 소재는 인간에게 어떤 들끓는 미완의 찌꺼기를 남겨 남김없이 분출해야 할 것만 같은 타는 갈증을 준다. 그 갈증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를 찌르는 그 통증은 무엇인가. 이것이 이 시대의 시대성이 아닐까.
*넷플릭스 시즌 드라마 <지옥 1>을 본 후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