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철학 공부는 쉽지는 않은 거 같다. 철학은 철학 그 자체를 위한 것 - 존재가 존재 그 자체의 영위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 학문은 학문 그 자체를 위함이다. 그러니 거기에 다른 목적이 끼어들면 길을 잃게 되는 것. 무목적성은 철학이나 존재나 학문도 마찬가지. 그러나/ 무목적성에 의하여 그 자체의 길도 드러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정해진 게 없다면, 자유 그 자체이다. 그렇다면 자유를 회복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으로 끝일까? 과연 목적이 없을까?
자기를 둘러싼 세상의 전체성은 너무나도 규칙적인 목적성을 드러내고 있다. 낮과 밤, 사계절, 밀물과 썰물, 때 되면 배고프고, 때 되면 잠을 자야 한다. 세계는 이 규칙을 복제하여 이루어져 있다. 인간의 삶도 그러하다. 자연의 규칙은 인간의 삶에 적용되고, 철학은 학문에도 적용된다. 다만/인간만이 혼돈을 경험한다. 인간만이 부재를 느끼고 망각을 회복한다.
철학이나 존재나 학문은 그 자체를 이롭게 한다. 반면에 여기에 연동된 인간은 역으로 자기를 이롭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향성에서 이탈하면 그 자신에게 해롭다는 의미일 것이다. 인간은 그 범주 안에서의 흐름을 찾아내려 애를 쓴다. 결대로 가려는 자연적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적인 것'은 결코 불규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의 방향성은 일방향성이다. 이 일방향성은 인간이 시간을 느끼는 방향성과 일치한다. 미학적인 방향성과도 일치한다. 세계는 진행되는 방향성이 있다는 것. 그 방향의 결을 찾는 게 철학, 거기에 체계를 부여하는 게 학문, 그 가치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게 미학이며 인간이다.
'효용의 극대화'라는 과잉은 무목적성에 근거하므로 개인의 가치는 아니다. 개인의 가치가 아니므로 무목적성이다. 개인의 가치가 아닌 무목적성은 그렇다면 집단의 가치일 수도 있다. 그리고 곧 자연의 가치일 수도 있다. 개인은 그 방향성에 그저 합류하여 어느 시점의 한 부분의 위치적 자리를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용학문에 의하여 인간의 이익적 관점이 개입한다. 자아의 혼돈을 초래 - 방황. 모순의 양면성. 인간의 모든 이야기의 탄생. 인간의 문명이 커질수록 우주는 더 커진다. 왜냐하면, 그 실체성이 점점 더 드러나기 때문이다.
한 존재가 존재하려면 얼마나 많은 것들이 필요한가? 한 존재가 존재하도록 우주는 얼마나 큰 것인가? 인간의 정신성은 빈 공간으로 미끄러지듯이 우주로 빠져나간다. 그리고 다시 빠져나간 반대편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니 이는 통로인데, 이어 붙인 흔적이 없는 통로이다. 존재의 세계 자체가 하나의 통로이다. 자신의 뒤통수는 바로 우주로 열린다. 앞이 감각이라면 뒤는 문이다. 존재의 세계가 커질수록 그 바깥으로 연결된 세계도 동시에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