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가지 잎사귀가 바람에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파도에 자갈이 구르는 소리처럼 들린다. 바람은 기억의 저편을 흔든다. 바람은 그 어느 곳과 연결시킨다.
<이효석 문학관>으로 가는 오솔길을 오르면서 그때의 봉평 장을 생각하지만, 끝없이 길게 펼쳐진 메밀밭 사이로 난 오솔길을 걷는 달빛 아래의 두 보부상 그림만 떠오른다. 전지적 구도이다. 달과 메밀밭 두 보부상이 한 번에 잡히는 시선이다. 영화적 시선이자 책의 시선이다.
어제 넷플릭스에서 '신의 분노'를 보았다.
영화는 어떤 시선에 대한 것은 끝내 풀어놓지 않았다.
모호한 채로 장막 사이에 그대로 둔 것이다.
문학관 주변의 오솔길을 산책하였다.
소설이란 인간에게 무엇일까?
창조자 관점에서 보자면 피조물에 대한 이해이지만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대체일 뿐이다.
다만 피조물은 그것을 모르고 끝없이 갈등하는 것이다.
소설이 신의 관점을 떠나서는 구성될 수 없듯이
모호한 장막 안에 갇힌 것은 한 세계이고 그 세계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한 장소에 이원의 세계를 덧씌우는 것은 신의 관점이며 창조자의 관점이며 전지적 작가 관점이다.
환상은 그때 어디에 있는가.
그대의 머릿속에 나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공유한 것이 서로 맞물리지 않았다면 환상은 존재할 수 없다.
이효석의 단편소설을 내가 공유하지 않는다면
이효석이 투사한 세계를 내가 공유할 수는 없다.
작품이란 바로 그러한 것
소통의 매개체로서의 스크린과 같은 것.
우리는 무엇으로 대화하는가!
메밀밭에서 우리는 환상을 공유하고 그것으로 교감한다.
현실의 관광지는 구실일 뿐
자기 머릿속 판타지로 그 공간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첩된 그 이원적인 세계가 없다면
우리는 반쪽처럼 공허해지는 것이다.
공허하니까 아마도 그 반쪽을 복제해 내는 것이다.
비로소 완전해지는 세계를 체험하게 되니까 말이다.
지나다 보니 봉평이었다
막국수를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무심결에 봉평에서
그 언젠가의 봉평축제를 떠올리며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가 막걸리 마신다고 하니까 못 마시게 했지?"
"결국 마셨잖아, 거기서 오래 있을 수 없으니까 그랬지!"
"그 생각밖에 안 나, 오래가네"
"딴 데로 이동해야 하니 그랬지!"
이리 기억이 다시 떠올랐으니
그때의 막걸리 삐짐은 이제 기억 저쪽으로 밀어 놓아도 좋으리라
기억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더 강력한 기억인지는 기억만이 안다
그 언젠가 봉평을 다시 떠올리면 또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막걸리 마신다고 하니까 띠띠 한 표정으로 못 마시게 했지!"
라고 말이다
생각날수록 세세해지고 살이 붙는 기억!
하지만 지금처럼 킥킥거리며 웃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막걸리 마시면서 투덜대거나
마시고 있는 내 표정까지 세세하게 소환되는 풍경에서
그들은 그곳에서 내내 존재한다
하나의 각인처럼 새겨지는 장면들
안녕! 내내 잘 지내! 하며 책을 더...
어떤 애상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것을 못내 놓고 온 듯한 그런 허전함
손에 잡히지는 않고 기억되는 그런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