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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boJang Jul 30. 2019

시베리아는 혼자다 (1)

절망의 끝에서 도망치듯 떠난 동토의 땅, 시베리아 횡단 열차 이야기 

플랫폼 위에 서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숨 쉴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저며오는 아픔에서 벗어나려고, 나를 그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현실에서 도망치듯 혹은 아픈 마음을 떠나보내듯 시베리아에 왔다. 살면서 언젠가 한 번쯤은 시베리아에 와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환희와 희망 속에서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오게 되는 기쁨의 연장선이었다. 지금처럼 불현듯 쫓기듯 오게 되는 곳이 아니었다. 올해 들어서 삶의 방향을 잃고 한동안 방황하고 있을 때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도피처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였다. 그리고 그렇게 며칠을 무엇인가에 끌리듯 정신없이 일을 해치우고 나니 어느새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플랫폼에 서있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아무런 설렘 없이 마주하게 되다니...

어린 시절, 첫 키스는 달콤할 거라고 믿었으나 막상 첫 키스와 마주했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기억만큼이나 무덤덤했다. 아무렴 어찌하겠나... 현실을 피해 어디든 도망을 쳐야 했고 이 곳만큼 적절한 도피처가 없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야지... 부디 이 여행이 끝났을 때 삶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다시 찾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렇게 기차에 올랐다.

9,297Km를  달려야 하는 기차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책, 끼적임 그리고 묵언


'많이 읽고 많이 끼적이고 말을 줄이자'

기차에 올라 자리를 잡고 앉아서 스스로에게 던진 첫 각오였다. 광활한 시베리아 평원을 지나가는 동안에는 싫든 좋든 외부와 단절된 기차 안에 있어야 한다. 그 안에서는 읽고 쓰는 것 밖에 할 것이 없고, 이곳에서 나는 말도 안 통하는 철저한 이방인이므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될 테니 '읽고 쓰고 묵언하기'에는 이이만 한 것이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차에서 읽고 쓰면서 7일을 보낸다고 삶이 기적적으로 바뀌지는 않겠지만 변화의 시작은 되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7호차 45번, 7일 동안 나는 이곳에서 읽고 쓰고 

한국을 떠나면서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을 몇 권 챙겨 왔다. 그중에 하나가 톨스토이가 쓴 <안나 카레니나>이다. <안나 카레니나>의 무대인 러시아에서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만 혹여 누군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다면 난 꼭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탈 것을 적극 권하겠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전혀 몰랐지만 여행의 마지막에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다.(그 특별한 이유는 글의 후반부에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다. 예전에 한번 읽었던지라 그냥 쉽게 쉽게 읽게 될 거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책을 다시 읽는 건 절대 수월하지 않다. 처음 읽었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러니 제대로 곱씹어 읽고자 하면 또 다른 사람이 읽는 것처럼 다르게 읽히는 게 당연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절망에 끝에 선 나에게는 그 의미가 더 다를 것 같다.



출발 9,297Km


저녁 무렵 어둑어둑해진 텅 빈 플랫폼에 기적소리가 울리고 9,297Km을 달릴 기차는 힘들게 첫 바퀴를 돌리며 대장정의 발걸음 떼었다. 이 기차 안에서 어떻게 일주일을 보낼 것인지 계획을 잘 세워야겠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열심히 세우다 보니 오롯이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기로 해놓고 여기까지 와서도 회사일처럼 우선순위를 정하고 계획을 짜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그저 주어진 시간에 흘러가는 대로 맡기면 될 것을 왜 이것마저도 계획을 하려고 하고 있을까? 내려놓자, 내려놓자... 이제 나는 망각의 땅, 시베리아를 초입에 두고 있다. 왜 내가 이곳에 오려고 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온전히 이 순간을 누리자.


이 넓은 객차에 나 혼자만 타고 있었다. 처음에는...

텅 빈 기차, 고난의 전조


기차는 이제 막 블라디보스토크 역을 출발했는데 주위를 둘러보니 객차에는 나와 중년의 러시아 여성분만 타고 있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복잡하고 냄새나고 시끄럽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한적하고 고요한 분위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여행의 시작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평온함은 앞으로 닥쳐올 고난을 미리 예견하는 것이었음을 그때는 전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40여분을 천천히 달려 도착한 다음 역에서 더블백을 둘러맨 40여 명의 러시아 군인들이 기차에 올라탔고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파란 눈에 노란 머리카락 그리고 짙은 녹색의 러시아 군복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을 때 너무 당황한 나머지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그렇다 방금 전까지 비어있던 자리는 군인들이 탈 자리였다. 이 기차는 러시아 입영열차였던 것이다.

텅 비었던 기차는 금방 군인들이 가득 찬 내무실로 변했다. 

<다음 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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