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 잭은 재무적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워너를 매각했다. 매각을 할 당시 워너의 미디어 포트폴리오는 화려했다. 원천 IP인 DC 코믹스도 가지고 있었고, Seven Arts로 대표되는 TV 제작사, 그리고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및 배급, 덧붙여 1950년대부터 꾸준히 사 모았던 워너 뮤직 사업 등 제대로 갖춘 포트폴리오였다.
단지 부족했다면 이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관리하고 조합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는 자금뿐이었다.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차세대 사업으로 지목한 스티븐 로스는 워너가 준비한 포트폴리오에 날개를 달기 위해 기존 사업을 정리했다. 주차장, 청소, 장의사 등 기존 사업을 매각 정리하고, 1972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즈(Warner Communications)로 재편했다. 스티븐 인생 최대의 도박을 한 셈이다.
친절한 로스씨
소위 기업을 인수하고 나면 PMI((Post-Merger Integration)를 진행한다. 두 기업이 합쳐졌을 때 물리적 통합과는 별개로 화학적 결합까지 이어지는 게 쉽지 않다. 인수 합병 후 두 기업의 갈등이 심화되어 합병이 실패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임러 벤츠(Daimier-Benz)와 크라이슬러(Chrysler)의 합병 실패나, AOL과 티임 워너(AOL-Time Warner)의 합병 실패 등이 대표적이다. 스티븐은 자신이 키워온 사업을 매각하고 전혀 새로운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사업에 집중했기 때문에 정확한 의미의 PMI와 직접 비교하긴 어렵지만, 미디어 역사상 가장 잘 한 합병 중 하나로 꼽힌다. 여기에는 스티븐 로스의 개인적인 성격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직원들과의 대화를 즐겼고, 작은 바인더를 가지고 다니며 직원들의 이야기를 청해 들었고, 모든 세부 사항을 바인더에 기록한 뒤 직접 검토하고 의사 결정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직원들은 서슴없이 스티븐에게 회사의 어려움이나 아이디어를 말할 수 있었다. 때문에 주차장 사업이나 하던 스티븐 로스가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 잭이 갈등을 유발할 정도의 강력한 카리스마로 워너를 이끌었다면, 스티븐은 친화력으로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를 이끈 셈이다.
포트폴리오를 최적화하다
이미 준비는 다 되었다. 워너 커뮤니케이션즈란 이름하에 1) 영화 부문인 워너 브라더스 픽쳐스(Warner Bros. Pictures), 2) TV 제작 부문인 워너 브라더스 텔레비전(Warner Bros. Television), 그리고 3) 음악 부문인 워너 뮤직 그룹(Warner Music Group) 그리고 4) 출판 부문을 담당할 DC 코믹스(DC Comics)를 보유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각 부문은 각자의 역할을 하면 순항했다. 아니, 나름 시장에서 '속세적 의미의' 성공을 거두었다.
1) 영화_최적의 블록버스터 전략
1950년대 갱스터 장르 영화를 개척하고, 1960년대 블록버스터 영화에 올인했던 워너의 DNA는 1970년대 폭발하기 시작했다. 엑소시스트(The Exorcist, 1973), 슈퍼맨(Superman, 1978), 매드 맥스(Mad Max, 1979)는 어둡고 우울한 워너의 색깔에 걸맞은 호러 장르에 DC 코믹스의 IP를 활용한 슈퍼 히어로 장르가 추가된 워너의 작품에 대중은 열광했다. 영화 죠스(Jaws, 1975)가 영감을 준 블록 버스트 전략을 통해 탄생한 영화들은 글로벌 시장의 문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고, 덕분에 영화 시장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회복했다.
무성영화는 그 자체로 글로벌이었다. 유성 영화는 언어가 전면에 나서면서 영어권 시장과 비영어권 시장으로 양분되기 시작했었다. 블록 버스터 영화는 기술적 발전과 더불어 다시 영어권/비영어권을 통합하는 글로벌 영화가 되기 시작했다)
블록버스터 전략은 영화 시장을 뒤흔든 최선의 전략이자 필승 공식이었다. 파라마운트는 대부 시리즈와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로, 유니버셜은 조스와 ET로, 20세기 폭스는 스타워즈로 블록 버스트 영화를 공식화했다. 가히 영화산업의 제2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2) TV _ 소소한 성공
Seven Arts를 인수하면서 본격적으로 진입한 TV 제작 시장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긴 했다. 그러나 오랜 노하우를 가진 영화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시트콤과 드라마를 제작했지만, 지속적이고 폭넓은 인기를 얻은 작품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나마 경찰 드라마와 액션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DC 코믹스 IP를 활용한 원더 우먼(Wonder Woman, 1975~1979)가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The Dukes of Hazzard (1979–1985)는 TV 시장에서 워너의 존재감을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그러나 방송사-방송국-제작사의 수직적 구조를 완성한 NBC, CBS, ABC 대비 제작만을 해야 하는 워너는 제한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는 케이블 시대의 여명기였다. 워너도 이 시기에 채널 사업에 관심을 보였고, 오늘날 가장 유명한 2개 채널을 론칭했다. 바로 Video Kills Radio로 유명한 MTV (1981)와 어린이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니켈로디언(Nickelodeon, 1979)이었다. 그러나 사업적 시너지 등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다. 전체 워너의 포트폴리오와 연결되는 지점이라곤 뮤직 사업 그리고 애니메이션 정도일 뿐, 워너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제작과는 크게 연관이 없었다. 결국 워너는 1985년 MTV와 니켈로디언을 바이아컴(Viacom)에 매각한다. 당시에야 핵심 사업인 영화와 음악, TV 제작에 집중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긴 했지만, 사실상 케이블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다.
3) Warner Music Group _ 창대한 성공
잭은 음악에 공을 들였다. 영화의 사운드트랙이 중요해지자 아예 레이블을 만들었다. 1958년 설립한 자체 레코드 레이블인 Warner Bros. Records가 그것이다. 일단 조직이 만들어지면 조직은 그 자체로 생존을 위한 관성이 작동한다. 사운드트랙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음악 사업에 진입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다. 1963년엔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Reprise Records를 인수했고, 67년에는 Elektra Records를 인수했다. Elektra Records의 간판스타가 더 도어스(The Doors)였다. 같은 해 레이 찰스, 아레사 프랭클린, 오티스 레딩 등이 소속된 Atlantic Records를 인수했다. 이렇게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던 중 1969년 매각을 했으니 그것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다.
좌우간 준비가 제대로 된 상태에서 1970년대 워너 뮤직은 굵직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규모가 받쳐주고, 시장에서 주도력이 생기자 유명 아티스트들과의 게약도 순조로웠다. Fleetwood Mac, Led Zeppelin, Talking Heads 등이 들어왔다. Fleetwood Mac의 Rumours(1977)는 음악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다.
Fleetwood Mac, Rumours (1977)
1980년대는 가히 워너 뮤직의 최전성기였다. Like a Virgin (1984)과 True Blue (1986)의 마돈다(Madonna)가 워너의 소속이었고, Purple Rain (1984)의 프린스(Prince) 역시 워너의 자산이었다. 1981년 MTV가 개국되면서 Warner Music의 아티스트들은 음악 비디오를 통해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었다. MTV의 설립을 이끌었던 워너는 자사의 아티스트들의 뮤직 비디오를 만들어 MTV에 소개함으로써 브랜드 가치를 높일 수 있었다. MTV가 Viacom에 매각된 1985년 이후에도 Warner Music은 MTV와 협력해 뮤직비디오를 통한 홍보 효과를 극대화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딱 하나만 빼고
그때는 최선이었으나, 알고 보니 최악의 선택
주차장, 장의사, 청소업을 하던 로스는 이제 명실상부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물이 되었다. 1950년대 TV의 등장과 함께 엔터테인먼트가 새로운 산업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과감하게 베팅했던 그는 1970년대 또 한 번의 빅 베팅을 한다. 그의 눈에 새로운 성장 기회,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유사히자만 훨씬 규모가 큰 또 하나의 사업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비디오 게임이다.
1972년 Pong이 출시되었다. 비디오게임의 어머니라는 별칭을 얻었던 바로 그 게임이다. 1975년 아타리(Atari)는 퐁을 가정용 버전을 출시했다. 사람들은 열광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기억하는 Space Invaders, Pac-Man, Galaxian 같은 아케이드 게임이 연달아 히트를 쳤다. 소위 오락실(아케이드 게임장)이 우후주숙 늘어났고,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도 Space Invaders가 인기를 끌면서 100엔 동전 부족 상태가 일어나기도 했다.
아케이드 비디오 게임이 사회 현상이 되었었다. 1977년 아타리(Atari)는 가정용 콘솔인 Atari2600을 출시했다. 비디오 게임 시장을 집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수백만 대가 팔렸다. 게임 카트리지 시장이 열렸다.
바로 이 대목에서 스티븐 로스는 비디오 게임이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사업의 하나로 보았다. 엔터테인먼트 영역의 하나의 요소라고 본다면 영화, 음악 등과의 시너지도 생길 수 있고, 새로운 오락 시장이 열리니 전통의 오락 사업자가 이를 놓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1976년 로스는 아타리를 전격적으로 인수했다. 1977년 아타리 2600이 등장하기 전의 인수라 상대적으로 작은 2800만 달러에 인수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론 성공적인 결정이었지만, 만약 아타리 2600이 실패했다면 그 몫은 고스란히 워너의 짐이 될 뻔한 것이기도 했다.
시장에서는 기술과 콘텐츠가 결합된 새로운 오락 시장이 열렸고, 이를 워너가 만들어 갈 것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선견지명을 가진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거물, 스티븐 로스는 혁신가였다.
1980년 초 비디오 게임은 매출액은 영화산업을 뛰어넘었다. 1982년 워너는 28억 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는데, 이때 매출액의 상당 부분 아타리에서 나왔었다. 그렇게 밝은 미래만 있을 것처럼 보였다. 최선의 순간에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
초과이윤이 발생하는 시장에선 언제나 신규 진입자들이 물밀듯이 들어온다. 1977년에만 하더라도 아타리와 메그나복스(Magnavox)가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였다고 한다면, 1983년에는 에머슨(Emerson)을 비롯한 10여 개 업체가 경쟁을 벌였다. 닌텐토와 세가도 이때의 플레이어다. 아타리는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경쟁사를 압도하기 위해서 새로운 게임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리한 시도였다. 숫자는 늘어났지만 품질은 하락했다. 특히 1982년 출시한 E.T the Extra-Terrestrial은 영화의 인기에 편승해 무리하게 제작했고, 제품의 완성도는 치명적으로 손상되었다. 대중들은 아타리를 외면하기 시작했다. E.T는 이후 게임 역사상 최악의 게임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성공을 예상하고 제작된 수백만 개의 게임 카트리지는 뉴멕시코 사막에 묻어 버릴 정도를 치명적인 손실을 안겼다.
결국 1984년 워너는 아타리 소비 부문을 Commodore 창립자였던 Jack Tramiel에게 매각했다. 매각 대금은 2400만 달러. 그러나 거래는 약간의 현금과 부채를 떠 앉는 조건이었다. 사실상 2800만 달러를 주고 인수했지만, 정작 매각할 때는 수백만 달러의 현금만 쥔 셈이다.
엎친데 덮쳤다.
1985년 알 파치노를 앞세운 영화 Revolution이 망했다. 예상된 제작비를 넘기면서까지 한방을 노린 대작이었지만 흥행은 참패했다. 또한 1987년 제작한 The Witches of Eastwick도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89년 Warner Communications은 Time Inc. 와 합병을 단행한다. Time - Warner의 탄생이고, 미디어 기업이 Conglomerate가 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