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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ren Jul 31. 2022

채드윅 국제 학교가 상징하는 것

1. 

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희망이 있다면 나는 그 희망을 인간이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다. 배움이 주변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더 나은 개인이 되기 위하여 계속해서 공부해나가는 사회적 실천을 의미할 때, 그것은 다음의 네 가지 이유에서 중요하다. 첫째, 배움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일 수 없고 오직 그 인간일 수 밖에 없어서 가지는 한계개인적 경험과 믿음을 일반화 및 정답화시키는 오류를 보완한다. 배움은 개인의 믿음이 현실의 사실(fact)과 불일치할 때 개인적 믿음을 정당화하는 대신 사실의 편에 설 수 있도록 돕는다. 둘째, 배움은 권력이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허위성을 직시하고 검증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를 훈련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역사가 권력을 가진 자들의 힘으로 쓰인다는 사실을 알 때, 그것을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대안적 사고를 제시할 수 있는 힘도 배움을 통해 가능하다. 셋째, 배움을 통해 개인들은 자유, 행복, 삶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재발견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사실과 정의의 편에 서는 일은 한 개인이 건강한 삶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지속될 수 없고 의미마저 없다. 개인의 삶이 작지만 의미있다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일과 그 삶에 의미를 더하는 즐거움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은 배움을 통해 다른 존재들의 시선들을 빌리고 생각을 변화시키면서 가능해진다.  배움은 개인이 공동체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을 수 있는 발판 또한 제공한다. 공동체가 혈연 및 물질적 이익과 관계되어 있지 않는 타인들과의 유대 관계를 말할 때 우리가 살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세상에서 공동체 의식이야말로 가장 왜곡되기 쉬운 가치다. 시장 질서 속에서 공동체 의식은 내집단 속에서만 가능하다. 개인이 속하지 않은 외부집단은 경쟁을 통해 이겨야 하는 대상이 된다. 협력의 범위가 넓히는 공동체 의식 대신, 집단 사이에 뚜렷된 구분선과 계급을 만들어내는 신자유주의적 배경 속에서 타인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살피는 일은 단순한 지적 능력이 아닌 심적 능력을 기를 때에야 가능하다. 나아가, 힘의 질서로 약자를 억압하려는 권력이 생길 때마다 각기 다른 파편인 개인들이 모여 권력에 맞서는 공동체를 만드는 일에도 배움은 주춧돌의 역할을 한다. 


2.

채드윅 국제 학교의 한 해 학비를 전해 들었을 때 내 귀를 먼저 의심했다.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 교육의 많은 요소들—학군, 사교육 유무 및 질, 심리적 안정감 등등—결정하는 게 자연스러워진 사회 시스템에서 사립 학교의 학비가 어쩌면 비싼 것도 당연할 테지만, 한 해 학비가 약 4900만원 (2022-2023년 기준 Grades 9-12의 학비)에 이르는 학교는 다른 세상 이야기처럼 들렸다. 채드윅은 그 곳에 자식을 보낼 수 있는 대한민국 부모가 몇이나 될까하는 의문을 만드는 동시에 부유층 자재들만을 걸러받는 이미 내재한 불평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했다.


채드윅 국제 학교는 2010년 인천 송도 자유 무역 지대에 세워진 국제학교다. 모든 수업이 영어로 진행되고, 그곳 아이들이 IB (International baccalaureate)라는 국제 교육 과정을 따르고, 학교의 80%가 넘는 선생님들이 석사 이상의 높은 학위를 가졌기 때문일까. 고등부의 학비는 5000만원에 가깝고 중등부, 유치/초등부의 학비도 별반 다르지 않게 (어마어마하게) 비싸다. 대한 민국 한 해 평균 가계 소득이 약 2000만원에 미칠 때* 채드윅에 자식을 보낼 수 있는 부모가 얼마나 많을 수 있을까. 세계 불평등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한국 상위 10%의 소득 점유율은 46.5%, 재산 점유율은 58.5%이다. 반면 하위 50%의 소득 및 재산 점유율은 각각 16%, 5.6%에 그친다.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아래의 기형적인 교육 생태계 속에서 채드윅 국제 학교는 한국 사회에서 상위 계층 부모들이 그들의 부를 이용하여 자녀들에게 교육 특권을 물려주는 양상을 보여주는 뚜렷한 예다.


채드윅은 교육이 공동체를 지키는 대신 계층을 구별짓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도구로 전락한 현실을 보여준다. 공교육 세계 속의 아이들이 오지선다형 문제 위에서 허덕이며 예체능 활동을 빼앗길 때, 채드윅의 아이들은 시험지 영어 대신 말하기 영어 능력을 키우고 아웃도어 액티비티와 예술을 즐긴다. 자녀를 국제 학교에 보낸 한 학부모의 말처럼 아이들의 건강을 헤치는 '미쳐 돌아가는'* 교육 환경에서 채드윅 아이들은 벗어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공교육은 제공할 수 없을 다양한 배움을 경험한다는 이점도 누린다. 채드윅의 아이들이 대한민국 교육의 저주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타적인 교육을 제공받을 때, 공교육의 아이들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시험 성적에 사활을 걸고 생존을 모색한다. 채드윅 아이들이 누리는 혜택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공교육 아이들이 수시와 정시 사이에서 골머리를 앓을 때, 채드윅의 아이들은 한국 대학 뿐만 아니라 외국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이중 기회를 가진다. 한국 사회가 대학의 네임 밸류에 관해서도 '미쳐 돌아가는' 현실을 상기할 때, 채드윅 아이들이 누릴 대학 진학의 이중 혜택은 그들에겐 더없이 달콤할 테지만 공교육의 아이들에게는 한국 교육 현실에 대한 또다른 낙담이다. 


'세계 시민(global citizens)'을 길러내겠다는 미션을 내건 채드윅의 졸업생 대다수는 국외 대학에 진학한다. 2019년 한 해에는 채드윅 졸업생 65명 중에 50명 이상이 세계 100위, 40명 이상이 세계 50위 안에 드는 명문대에 진학했다고 학교는 홍보한다. 채드윅이 말하는 세계 시민의 의미는 모호하고, 학교가 지향하는 방향성이 높은 명문대 진학에 있다는 점은 뚜렷해 보인다. 어쩌면 명문 계층을 길러내겠다는 선전이 세계 시민이라는 애매한 프레임보다 더 솔직한 채드윅의 미션은 아닐까 싶다. 한국 대학 서열을 5분위로 나눈 한 연구자료에 의하면*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일류 대학 졸업자는 하위 5분위 대학 졸업자들에 비해 14% 더 높은 임금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고용 시간이 지나면 임금 격차는 최대 40%까지 벌어진다. 그에 더해, 노동 시장에서 높은 토익 성적을 가진 고용인일수록 높은 임금을 받는 현상 또한 목격된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의 학교를 결정하고 그 학력이 고용 시장에서 임금까지 결정하는 사회에서 명문대 졸업장과 영어 능력을 업은 채드윅의 아이들은 계층 사다리 높은 곳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채드윅 아이들의 가지는 특혜—양한 교외 활동들, 영어 말하기 능력, 대학 진학의 이중 기회—와 그것들이 가질 노동 시장에서의 이점을 전해 들을 때, 공교육의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부모의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교육 및 기회 접근권, 나아가 노동시장에서의 잠재적 임금에 영향을 끼치는 시스템의 근본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들은 오직 앞 혹은 위를 바라보고 전진해야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흙수저라고 자기 신세를 자조하거나 헬조선이라고 사회를 냉소할 수는 있지만,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시 문제지로 돌아가야 한다. 치열한 경쟁 그 자체도 문제지만, 나는 일부 상위 계층 자제들이 받는 그릇된 교육적 특권 또한 더불어 주목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도 힘겹지만, 특혜를 받고 자라나는 채드윅의 아이들과 (채드윅과 비슷한 국제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포함하자) 그것들을 가지지 못한 공교육의 아이들 사이의 경쟁은 시작부터 한 쪽에게 고문일 수 있다. 아이들의 교육마저 시장의 질서에 내던져졌을 때 우리는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내돈내산'이라는 유행어를 따라 내가 번 돈으로 내가 산다는 신자유주의적 사고로 채드윅을, 교육 불평등을 바라봐도 무탈할까.   


나는 교육이 계층을 재생산해내는 도구로 쓰이는 신자유주의 시스템의 근본적인 결함에 주목한다. 극심한 부의 불평등 속에서 상위 계층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자본을 자녀들의 문화적 자본으로 탈바꿈하며 계층을 재생산해나갈 때 (브루디외 참고), 먹고 사는 일 앞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경제적 하위 계층들이 불평등한 시스템에 비판적이기는 힘들다. 아이들은 주어진 문제지를 잘 풀지는 모르나 대안 없는 경쟁에 내몰린 탓에 다름을 생각하는 일에는 취약하다. 신자유주의 속 아이들은 어른들의 생존 전략—옆 사람을 이기거나 윗 사람을 따라 잡는—을 체화하고, 부와 권력이 생산해내는 내러티브에 마음을 끄덕이는 어른으로 자란다. 생각 대신 생존이 있고 비판적인 사고 대신 사고의 복종이 있다. 경쟁을 통한 생존을 가르치는 교육에서 아이들이 사회 소외 계층을 바라보는 일에 무감각해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신자유주의 깃발 아래에서 교육은 시장의 생산성을 돕지 않는 가치들—소외 계층을 바라보는 일, 공동체를 꾸리는 일—은 철저히 제외시키기 때문이다. 지식은 돈의 세계에 발 묶이고 비판적 사고는 권력을 변호하기 위해 쓰인다. 다시 말해, 현교육은 세상이 사람들과 함께 사는 곳이라는 비전을 아이들에게서 빼앗고 좁아진 공동체의 범위 아래에서 적과 경쟁하는 것을 부추긴다. 무엇를 위하여? 가진 자들을 헤게모니를 위하여.


교육을 통해 개인이 (1)참을 아는 일, (2)자유롭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힘, (3)사적 삶을 지켜내는 일, 그리하여 (4)공동체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는 일은 이제 너무 이상적이거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상위 계층에서 교육이 클라스를 구별하는 도구로, 하위 계층에게 살아남는 생존의 도구로 전락해버릴 때, 앞으로의 교육에 어떤 희망을 가져야할지 모르겠다. 미래는 곧 아이들이고 희망 또한 그들에게서 생겨날 때 우리가 가진 현 시스템이 건강한 아이들을 길러낼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티즌을 만들겠다는 채드윅의 이념이 그 곳 아이들을 더 나은 사회 구성원으로 자라게 할 거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글로벌 시티즌들이 오직 그들만들 위한 리그 속에서 그들만의 풍족함을 향한 건배에 그친다면, 특권 대신 불평등을 마주한 사람들의 세상을 마주하지 않는다면, 글로벌이란 형용사는 자기 도취적인 장식구에 지나지 않는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그 땅의 주인인 원주민들을 야만인(savege)이라고 부르며 말살하므로써 시작됐던 세계화가 언제나 특정 계층, 인종, 성별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어져온 역사를 생각할 때,  채드윅이 말하는 세계적 인재는 그것과 얼마나 다를 수 있을까. 글로벌이 진행될수록 세계의 부는 더 나눠졌고 공간이 넓어지는 동시가 계층 구분도 더 커졌다. 식민의 역사 속에서 세계화 시대의 인재가 된다는 말의 의미가 뭔지 비판적으로 따져보는 동시에 경계선을 넘어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의 가치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에 익숙해지고 나니 이제 AI의 시대가 왔다. 세계는 넓어졌지만 모두가 넓은 세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기술이 발전했지만 모두가 기술의 혜택을 골고루 누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AI를 조종하는 인간들이 있는 반면 그들의 조종을 받아들여야하는 인간들이 있다. AI가 정말 교육 불평등을 해소할 열쇠가 될수 있을지(시사인 기사 참고) 아니면 더한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파국을 초래할지는 모르겠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AI가 교육에 어떤 모양으로 쓰일지 인간들이 결정할 것처럼 우리가 현재 마주한 교육의 불평등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또한 우리 개개인들의 몫이라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10% 사람들이 절반이 넘는 재산을 거머쥐고 절반이 넘는 인구가 10%도 안 되는 재산(5.6%)을 갖고 아웅다웅할 때 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걸까. 왜 아무도 싸울 수 없는 걸까. 교육의 문제는 아닐까. 불평등에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대신 불평등에서 살아남는 경쟁을 가르치는 교육 때문이 아닐까. 불평등을 기본값으로 받아들이며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나른하고 느긋해지려는 내 생각의 게으름에 반기를 들고 싶다. 돈이 만들어내는 애초부터 다른 출발선에 고개를 끄덕이며 권력의 헤게모니를 따르기 위해 애쓰는 대신 의문을 제기하고 싶다. 인간의 희망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데에 있을 때, 배움의 기회야말로 모든 아이들에게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할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한 부분이 되기 위해서라도 나는 배움을 이어하고 싶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누리는 배움의 환경이 그것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평등한 모양을 띌 때, 평등을 보고 자란 아이들이 다시 좀 더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애쓸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어른이란 열심히 공부해서 멋진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 어른이 아니라 불평등을 변화시키고자 계속해서 배우는 어른들일지도 모른다.


[참고]

Chancel, L., Piketty, T., Saez, E., Zucman, G. et al.(2022) World Inequality Report 2022, World Inequality Lab, 219-220. wir2022.wid.world


Lee, C. (2022). Hidden ideologies in elite English education in South Korea. Journal of Multilingual and Multicultural Development, 42(3), 221-233. https://doi.org/10.1080/01434632.2020.1865383. 


Lee, J.& Go, Y. (2019). College Ranking and Life Cycle Wage in Korea. Korea Labor Institute, 1,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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