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도리에 가 보았어요
다랑쉬오름에 처음 오른 건 2003년 가을이었다. 오름 자체도 머리털 나고 그때가 처음, 그게 뭔지도 몰랐던 시절이다. 비행기에서 일정표를 받아보고 그 단어를 처음 인지했던 것 같다. 돌, 바람, 여자 그래서 삼다도래. 고작 이 정도 지성으로 ‘우리 땅 밟기’ 라는 답사 프로그램에 참가했는데 일정 중에 오름이 있었다. 고요한 벌판에 봉긋한 봉우리가 눈에 설었다. 저길 올라갔다 내려온다고? 꼭대기에는 뭐? 분화구가 있어? 당최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지금은 방문자센터, 등산로 그림판, 화장실 등이 갖춰져 있지만 당시에는 이런 시설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로 발을 들이라는 건지, 이정표 없는 풀숲을 헤치고 첫 사람이 앞장서면 나머지 일행은 한 줄로 그 뒤를 따랐다. 산길은 몸 하나 폭 정도로 좁고, 꽤 가팔라 미끄러웠는데 그마저도 누구 말처럼 한 사람이 가고 다음 사람이 가다 보니 생겨난 길 같았다. 앞 사람이 밟았다 뗀 흙 위 발자국에 내 발을 포개며 한 발 한 발 올라갔다, 자칫 스텝이 꼬이기라도 한다면 나 혼자 미끌어지고 끝날 형편이 아니었다. 줄줄이 뒷사람들까지 넘어질 수 있는 상황이라 선두를 제외한 열 명 남짓한 일행 모두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걸었다.
어렵사리 4~50분, 열 사람의 무거운 걸음마가 끝나고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서 있는 곳이 밑에서 바라보던 능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로, 깔때기처럼 곡선으로 패인 분화구가 내려다보였다. 세상에, 이것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풍경. 바들바들 떨렸던 발걸음에 힘이 생기고 위태위태하던 마음에 오름의 바람이 훅 들어왔다. 분화구 둘레를 천천히 한 바퀴 걷는데, 와 정말, 검색하지 않아도, 경험자들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왜 여길 오르는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낄 수 있었다. 보고 듣기에 앞서 몸이 먼저 오름을 통과한 것 같았다. 그렇게 오름을 시작했다.
그날 이후 오름은 ‘돌, 바람, 여자’ 보다 더 제주도였다. 어떻게든 다랑쉬에 올라보고자 휴가 계획을 짰다. 친구 몇몇을 데리고 올랐고 딸이 처음 오른 곳도 다랑쉬오름 이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오름들도 궁금해졌다. 오름이 글쎄, 300개가 넘는다는데 세상에, 죽기 전에 몇 개나 더 가볼 수 있을까, 마음이 아득해졌다. 내가 전생에 설문대할망이랑 한 집안사람이었나, 왜 나는 오름이 좋은 걸까 스스로에 묻고 또 물었고 답이 있을까 오르고 또 올랐다. 그러던 중, 거문오름을 만났다. 2년 전 여름, 삶의 아군 같은 한 친구와 둘이서, ’그럼 우리 내일 공항에서 만나‘ 세상 가장 설레는 인사를 나눈 뒤 제주도로 날아온 여행이었다.
거문오름은 사전예약이 필수였다. 천연기념물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때문인지 탐방객 수칙도 있었다. 음식물 반입 금지는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물 말고 다른 음료는 안된다며 확인하길래 아, 몰랐네요 했다. 비가 와도 우산을 펴지 말 것과 그러니 양산도 사용 금지. 궁금증이 일었다. 스틱이나 아이젠도 안되고 심지어 큰 소리로 대화하거나 웃는 것도 자제해 달라고 했다. 왜? 더 중요한 건, 화장실도 없다는 것.
이유를 듣고 보니 고개가 격하게 끄덕여졌다. 오름에 흐르는 것은 물밖에 없고, 우산이나 양산을 펼쳐 나뭇가지나 잎들의 자태를 망가뜨리고 방해할 수 있었다. 스틱이나 아이젠으로 땅을 찍어 흙이 파일 수 있고 풀이나 나무가 긁힐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너무도 경이로운 이유, 새들이 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니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화장실 역시 인간의 배설물을 자연에 보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겠다.
알을 품은 새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사람들의 눈과 귀, 마음의 평화 따위를 위해 오름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태곳적부터 먼저 그 자리에 있었을 자연의 입장에서는, 별 도움도 안 되고 반가울 것도 없는 인간의 방문인 것이다. 자연 앞에서,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그저 여타의 생물에 불과한 존재구나. 내 위치가 정확히 짚어졌다. 자연에 허락을 구하는 태도와 마음으로 오름에 든다니, 비록 미물일망정 영광스럽고 고마웠다고나 할까.
생각해보니 오름은 대부분 가볍게, 맨몸으로 올랐다. 긴바지에 운동화, 물병 하나. 물론 왕복 시간이 짧아서 그럴 수도 있었지만, 손을 비우고 올라도 내려올 땐 뭔가 가득 찼다. 마치 아이 방에 들어가 잠든 아이가 깨지 않게 살짝 머리 한번 쓰다듬고 나오는 것처럼, 오름도 잠시만, 살짝 올랐다 내려오는 심정이었달까. 집 근처 아차산은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오름은 하루에 두 봉우리도 가능한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 마음을 일상에 이어 하루하루 산다면 어떨까. 이고 지는 장비빨 아니고 아침에 출발해서 저녁에 내려오는 거 말고, 오이를 씹어먹으며 ’야호‘를 외치거나 믹스커피를 따라 마시며 맞춰 간 김밥 포일을 벗기지 않아도 되는, 오름. 내가 지금 그곳에 오른다면? 내 앞에 오름이 있다면? 물음을 따라간다.
가벼운 삶이 그 답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 찾는 중이고 생활에서 지키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물욕‘ 줄이기. 빈손으로 풍경 앞에 섰을 때, 나도 풍경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그 기억을 잊지 않기 때문에. 사들이는 일부터 덜 하기로 했다. 특히 옷 같은 것들. 옷 좋아하는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미 가진 옷들을 오래 입기로 한다. 올 한해는 옷 사는 일이 많이 줄었다(코로나 덕분?). 내 눈앞에 오름이 있는데, 석탄을 때고 석유를 써서 대체 불가능한 지구 자원을 없애고 나온 잘 빠진 새 옷이라니, 부끄럽다.
나에겐 무려, 300개도 넘는 오름이 남아있다. 얼마나 더 오를 수 있을까 물어봤자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모르겠고. 하지만 오름을 오르는 것처럼, 마음과 태도를 간직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면 그럴 수 있겠다고, 실천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