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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 Dec 13. 2017

집으로 가는 길

숨은 공간 찾기 : 부암동 창의문

'아가씨, 여기가 뭔일 덴 줄 알아요?'


요즘 세상에 나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사람은 흔치 않다. 맞다 여기는 택시 안이다. 오랜만에 다정한 기사님을 만나 물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해 소상히 설명을 듣던 중이었다. 집에 다 와 가는데 기사님은 저 너머에 보이는 창의문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안다고도, 또 전혀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이 애매한 상황에서 기사님의 설명을 들어 보고 싶어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치 잘 모르겠지? 여기가 북한에서 무장공비들이 내려와 갖고 싸운데 아녀. 여기서 그거 막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동상이야 저기."

"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아가씬 태어나기도 전 일이니까. 그때 정말 대단했지 우리 학교도 못 가고 그랬다니까."


이 동네 이사 오고 한 일 년쯤은 모르고 살았던 사실. 그날 이후 여기를 지날 때면 가끔 머릿속으로 떠올려 본다. 정말 대단했을 그때 그 시간들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진다 대개 많은 것들이 그렇다. 그런데 가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내게는 창의문이 그랬던 것 같다.  



창의문은 이 일이 벌어지기 한참 전 태조 때 세워졌다. 문 앞에는 서울 성곽길 입구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그 아래 안내판에선 창의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사소문 중 하나로 '북문' 또는 '자하문'이라고도 불림,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한 번 보수했고 현재 남아 있는 사소문 중 유일하게 완전하게 남아 있는 문.' 지나갈 때마다 여러 번 읽어 봤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진 않는다. 중요한 건 그 시절에 세워진 것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하루에 한 번 내가 이 문을 지난다는 것. 우리집 대문이 아니라 동네로 들어가는 입구에 놓여 있는 이 창의문을 말이다.


본격적으로 여기를 지나다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 위엔 창의문이 없다. 이보다 한 정거장 뒤인 '부암동 주민센터'에서 내리는 게 집까지 더 빨리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근데 뭐 꼭 집을 제일 빠른 길로만 가란 법 있나. 뭐 이런 시위하는 마음으로 나는 종종 이보다 한 정거장 전인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내려 창의문을 통과해 집으로 간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괜찮다. 이 길을 더 좋아하니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내 의지로 선택한다는 건 생각보다 꽤 큰 즐거움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의 선택지를 하나에서 둘로 넓혀 놓고 그날 그날 기분에 따라 발걸음을 달리 했다. 피곤에 찌든 날은 가장 빠른 길로 후다닥 집으로 도망치듯 들어갔다. 그러니 굳이 창의문으로 돌아가는 날은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에너지가 남아 있는 경우일 때가 많았다. '아 오늘은 내려 좀 걸어 볼까?'하는 생각이 드는 하루가 많을 수록, '오늘은 제법 즐거운 하루를 보냈군'이라고 스스로 그날의 컨디션을 짐작해 볼 수도 있었다. 좀 더 걷고 싶은 날은 두 세 정거장 앞에 내리기도 한다. 이 동네 특성상 오르막이 많은데 걷다 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나오는데 여기가 바로 창의문이 있는 정거장이다. 서울에 이보다 더 낭만적인 정거장 이름이 있을까.


어느 맑은 날,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야경
창의문에서 바라 본 비 오던 날의 풍경


언덕에서 내려와 창의문 쪽 계단에 올라서면 다시 맞은편 아래로 서울 야경 차르르 펼쳐진다. 이 야경을 등지고 가는 그때 그 기분이 참 묘하다. 비가 오는 날은 이곳에 밀집된 꽃과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풀내음을 더 진하게 맡을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이 곳을 단지 통과하는 것만으로 난 비로소 복잡한 도시에서 퇴근해 나만의 동굴로 들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비 오는 날 멍하니 창의문의 아치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이곳이 꼭 날 다른 차원으로 데려다 줄 것만 같았다. 


집으로 가는 ,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걷게 되는 길. 이 길은 누구에게 공평하게 하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인생 복잡하고 어려운 선택들이 많은데 그에 비하면 이건 정말 너무 쉬 선택 아닌가. 그런데 왜 매일 똑같은 길로만 다니고 있을까? 살아갈수록 일상 속에서 이런 소소한 선택들을 만들어 나가는 게 대 전공이나 회사를 선택하는 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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