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모처럼 일찍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펄펄 눈이 내리고 있다. 아직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로 하얀 눈송이가 차곡차곡 쌓이는 걸 보고 있는 게 얼마만인가. 코가 빨개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눈은 쌓이면 안 되고 쌓이는 즉시 치워져야 하는 애물단지가 된 것 같다. 특히 이렇게 골목이 좁고 언덕이 가파른 동네에 오래도록 살다 보니 제때 치우지 못해 꽝꽝 얼어버린 길 때문에 애를 먹는 경우를 자주 보고 산다.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출근이 늦은 편인 난 한겨울에도 항상 눈이 치워진 길만 봤었는데 이렇게 하염없이 쌓이는 눈을 보고 있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낭만도 잠시. 쓱-쓱-쓱-쓱- 어디선가 눈 치우는 빗질 소리가 고요한 골목길을 울렸다. 아 그래 누군가는 오늘도 이 길 위로 출근하느라 고생할 테고 또 동네 사장님들은 가게 앞 눈을 치우느라 평소보다 분주한 하루를 보내시겠구나. 그럼 난 뭘 하지? 아 그래 나는 당분간 인터넷으로 물건 사는 일을 자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적이 있다.
평소 같으면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받고 싶었다.
'여보세요.'
'택밴데요'
'아 네 거기 공동 현관문 여시고.. (기사님들에게 항상 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말을 자르며)'
'거기 이미 놨구요. 근데 길이 얼어서 참 이거 내려가기 난감하네요. 뚜뚜뚜뚜..'
짜증 난 목소리 너머 툭 끊기는 불친절함. 기분이 나쁠 만도 한데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됐구나'. 이분들 고생 좀 하시겠네 하는 생각이 먼저 머릿속을 스쳤을 뿐. 소형차 두 대만 들어와도 진입로가 꽉 막혀 버리는 좁은 골목길, 여기에 눈이 쌓이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살얼음판이 되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몇 해 전인가는 주문한 물건을 일주일이 넘도록 못 받은 적도 있다. 연말연시이기도 했지만 그때 내린 폭설로 택배 차량이 골목 안까지 도무지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급할 땐 큰 도로까지 직접 뛰어 나가 물건을 받아 온 기억도 여러 번. 여기는 엄연히 사대문 안이고 나는 어엿한 종로구민인데 이럴 때 보면 꼭 서울 속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눈이 많이 내릴 때는 알아서 급한 물건은 인터넷이 아닌 직접 밖에서 사 오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런 기사님들의 고충을 듣는 것에 익숙해진 걸까.
가끔 네이버 스토어팜으로 주문이 들어온 책을 직접 택배로 부쳐주기도 하는데 지난달 한 고객의 배송 메모가 참 인상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어디 어디 놔주세요' 또는 '부재중일 땐 연락 주세요' 이런 말들을 적곤 한다. 근데 그 주문자의 메모엔 '급하지 않습니다. 기사님 수고 많으십니다. 항상 안전 운전하세요.'라고 쓰여 있었다. 늘 '나'를 위한 내용을 썼던 나는 문장의 주어가 '기사님'으로 바뀌어 있는 그 문장에서 한참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오늘처럼 이렇게 폭설이 내린 날에는 되도록 인터넷 구매를 자제해 보려고 한다. 이른 아침부터 골목길에 뛰어 나가 빗질할 부지런함은 없으니 눈 오는 날 동네를 위해 할 수 있는 나의 일이란 참 소박하다. 꼭 사야 할 물건이 있다면 그건 밖에서 사 오는 걸로 하고 그래도 꼭 인터넷으로 살 물건이 있을 땐 이렇게 기사님을 위한 편지를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