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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sorim Oct 14. 2016

나를 저 멀리 데려다 주기를.

_멜버른, 나는 '너'를 만난 것이 아니라 '나'를 만난 것이었다.



나는 언제나 바랐다. 나는 언제고 바랐다.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줄 사람을 바랐다. 내가 언제고 아주 머나먼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하는 만큼이나 오늘의 이 자리에서,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줄 사람을 바랐다.


우연의 힘은 때론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 나에게는 늘상 잘 일어나지 않던 마법 같은 일들은 이따금 바로 그 '나'에게도 일어나곤 하고 나는 그 가끔의 순간들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장마 뒤의 찬란한 햇살을 맞이한 것처럼, 가슴이 벅차오르곤 한다.


우리는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검은 사람이었다. 무채색의 사람이었다. 반면에 너는 알록달록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색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는 너의 그 알록달록함이 좋았다. 무심결에 올라탄 트램에서 까아만 나는 알록달록한 너와 마주 보고 앉았다. 너는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으나 너와 나의 첫 만남은 그저 흐리멍덩하게 흐려졌다. 일주일 즈음이 지난 후였을 것이다. 너무도 햇살이 간절하던 어느 따사로운 오후였다. 분명이고 커다란 태양이 나를 내리쬐고 있음에도 나의 마음은 축축하다 못해 물이 뚝뚝 떨어졌고 완전히 갈 곳을 잃은 나는 거리를 배회하다 멍하게 트램에 올랐다. 그런데 알록달록한 네가 있었다. 내 앞에 알록달록한 네가 지난번과 똑같은 그 알록달록함을 가지고 내 앞에 있었다. 나 역시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또다시 마주 보고 앉았다. 나의 까아만 어두움은 끝내 너의 선명함에 가 닿지 못했고 개운치 못한 아쉬움만 남긴 채 우리의 두 번째 만남도 그저 흐리멍덩하게 흐려졌다. 그리곤 너를 잊었다. 아니 실은 이따금 트램에 오를 때면 혹시나 하는 마음을 품었다. 그리곤 적었다. '질척이는 오늘의 아침은 '우연한 익숙함'으로 쨍해졌다'고 적었다. 가벼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는 그런, 딱 그 정도였다.


세상이 너무 좁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니 혹여 또 마주하게 된다면 인사를 해볼까 하는 정도의 마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딱 그 정도였다. 더 이상은 없었다. 그러다 우연한 어느 날 트램에 오르다 너를 생각했다. 또다시 그 알록달록함을 마주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뭔가 달랐다. 우리가  마주 보고 앉을 공간이 없는 객차였다. 내가 올라서는 순간, 까아만 내가 올라서는 순간 무채색의 나에게 강렬한 색을 포개어줄 너는 보이지 않았다. 뭘 기대하는 건가 싶었다. 그래 난 뭘 기대하는 거야 외쳤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북적이는 트램 안에서 유일하게 남은 빈자리를 보았다. 사실 그 빈자리 보다도 너를 먼저 발견했는지도 몰랐다. 우연의 힘은 때론 놀라울 만큼 강력하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어떠한 힘에 의해서, 연유에 의해서 나는 거짓말처럼 딱 너의 옆에 남아있던 빈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는 너를 알았다. 너도 나를 알았다. 우리는 웃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눴다. 너는 내게 손을 내밀었고 우리는 악수를 나눴다.



.

나는 언제나 바랐다. 언제고 바랐다. 까만 내가 알록달록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아니었다. 나는 언제고 검은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까아만 나를 전혀 다른 알록달록한 세상으로 데려다 줄 사람을 바랐다. 그를 바랐다. 그렇게 알게 된 너는 너의 세상에 나를 잠시 초대했고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을 만났다. 아, 그러나 나는 검은 사람이었는 것을. 까아만 사람이었는 것을. 그랬다. 언제나 바라던 것을 '이루었다'고는 볼 수 없지만 조금 '들여다보았다'고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나는 작은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자그맣고 흐린 사람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한없이 작아졌다. 네가 아니라 나였다. 네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나를 작게 만들었다. 그저 나는 까아맣게 남아있기만 하면 되는 것을. 알록달록한 너에게 나의 까아만 저 나락의 끝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그 까아만 질척한 그림자를 너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아니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는 언제나 바랐다. 언제고 바랐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날아가고 싶었다. 작은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보잘것없는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나는 그저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었다. 꽤나 오래 잃은 것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길을 찾기를 바랐다. 나의 어둠이 가볍고 힘없는 것이 아니라 무겁고 강력하기를 바랐다.


그런 밤이다. 아니 낮이다. 아니 알 수 없는 시간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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