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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피 Nov 14. 2023

불멍

불길 속에 빠져든다.


장작불과 개구리





불멍에 빠지는 시간.



딸아이가 그려준 그림에 개구리가 보인다. 아빠 엄마가 커피숍에서 불멍하고 왔다면서 그려달라니 뜬금 개구리 한 마리를 넣어놨네? 개구리가 깨꼴 깨꼴? 지금은 개구리가 진즉에 다 들어가고 타작도 끝나 서리가 내리는 계절. 진주에서 사천대로를 따라 쭉 내려오다 보면 보이는 풍경. 하얗게 물들었다가 갈색으로, 빨갛게 종내에는 까맣게 저무는 정경. 사천 실안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멈춘 곳. 몇몇 대형 커피숍이 모여있는 곳. 서쪽 바다가 주황빛으로 물들었다가 점점 더 붉게 영그는 시간. 한없이 빨갛게 변하다 끝내 까맣게 잠기는 그 틈새가 아까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곳. 사방이 다 어둠으로 덮이면 바다든 하늘이든 구분되지 않아서 어느새 내 앞에 내 옆에 사람을 쳐다보게 된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할까. 커피숍 종업원이 불을 피운다. 장작 더미에 색 가루를 뿌리니 불색이 초록으로 파랑으로 바뀐다. 작은 판타지가 펼쳐진다. 그림 같은 불을 본다. 내 옆에 사람 손을 잡고 내 앞에 사람을 보며 웃는다. 등 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눈앞에는 따뜻한 불길이 인다. 차가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니 이것은 마치 눈 내리는 겨울 탁 트인 온천에 들어간 것처럼 야릇하다. 눈송이를 맞으며 온천에 앉아서 기분 좋아했던 추억. 찬바람을 맞으며 움츠리다가 장작불 앞에서 아, 따땃하다~ 하는 지금. 사는 게 버거워 눈빛이 흐리멍덩해질 때 자그마하게 웃음 지을 수 있는 환희. 춤추는 불길이 하늘로 치솟다가 사라지고 새로운 불길이 연달아 올랐다가 사라지고 찰나의 시간 무한히 반복되는 그림. 좋았다가 나빴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어느새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되는 장면. 


소소한 행복으로 치유받는 시간.


나만의 퇴폐로운 한때. 


따끈한 커피를 호로록 마셔도 되는 밤.


불길에 마음을 주는 밤.


실컷 불장난을 해도 되는 밤.


쉴 수 있는 밤.




사천 실안 바다가 보이는 커피숍에서의 불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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