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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y 09. 2017

#15, 시코쿠에서 지치고 힘들고 아프다

폰 사진마저 안 찍은 날 (for #37)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맑음


국민숙소토사(国民宿舎土佐) - 28km - 아와민슈쿠(安和民宿)



토사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일출이 예뻐서 카메라가 없는 게 아쉽고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는 것도 슬프다.

그렇다한들 더 머무를 수는 없을 터라 아침을 든든히 챙기고 길을 나선다. 


36번 쇼류지(青龍寺)에서 37번 이와모토지(岩本寺)까지는 58킬로에 달한다. 그 다음 38번 곤고후쿠지(金剛福寺)는 시코쿠의 최남단인 아시즈리곶에 위치하므로 오헨로미치 중에서 가장 긴 거리인 87킬로를 자랑한다. 게다가 아시즈리(足摺)곶에서 다시 올라오는 코스인 39번 엔코지(延光寺)까지도 56킬로이므로 오늘부터 3개의 절을 거쳐 고치현을 마무리하는 데 200킬로 가까이 걸어야 한다는 의미다.

한숨이 절로 나오지만 어차피 1200킬로 안에 포함되므로 이제까지처럼 한걸음 한걸음 걷고 또 걷다보면 닿을거라고 최면도 걸고 스스로 위안도 삼아본다.


오늘의 목적지는 이와모토지까지의 중간지점인 스사키시(須崎市)의 서남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아와민슈쿠(安和民宿)다. 

토사를 나서서 어제 올라온 곳과 반대방향으로 요코나미반도의 남쪽 47번 도로를 따라가는 요코나미스카이라인(横波スカイライン)은 도쿠시마의 끝자락 미나미아와선라인(南阿波サンライン)과 닮아있다. 구불구불 중간중간 바다를 조망하면서 걷는 길이라 평소라면 매력적일 테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습기가 장난이 아니고 쭉 완만한 경사로를 오르다보니 힘이 배로 든다.


초반부에 같이 걸은 30대 초반의 비교적 젊은 아가씨는 집이 오사카란다. 직장을 다니다 3개월 휴직을 하고 떠나왔다는데 집이 가깝기에 지칠만하면 한번씩 다니러 갔다와도 되선지 짐도 비교적 단촐하다. 이번 주말에도 오사카엘 다녀올 예정이라고 하니 부러운 마음도 든다.

한국엘 6번이나 가봤다고 하는 이 아가씨는 한국의 값싸고 질좋은 화장품, 팩 종류에 관심이 많다. 나도 모르는 브랜드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 한류 드라마에도 관심이 많은 데 의외로(?) 김남길을 제일 좋아한다고... 어머니는 역시나 욘사마 배용준의 광팬이라서 춘천에도 다녀오고 했단다.

나도 일본 드라마를 많이 보는 데 한국에서 제일 인기있던 기무라타쿠야보다는 호타루의 빛의 그 후지키나오히토를 제일 좋아한다고 같이 깔깔대며 걷는다. 


요코나미반도를 내려간 우라노우치(浦ノ内)에서 쉬어간다는 그녀와 헤어져 다시 홀로 걷는다.

23번 도로와 만나는 곳에서 좌회전, 쭉 23번 도로를 따라 산간도로를 걷다가 오시오카강과 사쿠라강이 만나는 곳에서 다리를 건너면 JR도산선(土讃線)의 오오노고(多ノ郷駅), 오오마(大間駅), 스사키(須崎駅), 도사신죠역(土佐新荘駅)이 S자를 그리는 스사키시의 번화가가 나타난다.

안내책자에 의하면 도사신죠역 근처의 가와우소노사토스사키(かわうその里須崎)에는 선어요리를 맛볼 수 있는 항구 직송의 활어와 해산물이 많고, 가다랭이를 눈앞에서 조리해서 호쾌하게(?) 굽는 「가다랭이의 타다키」와 특산물인 가츠오부시를 판매한다고 나와 있으나 혼자라서 그 호쾌하게가 어떤건지 확인을 할 수가 없다. 결국 평소처럼 편의점에서 맥주와 삼각김밥으로 점심을 때운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아스팔트에서 확확 올라오는 열기를 쬐선지 유난히 의욕이 없고 허리가 아파온다. 

걷기 시작한지 나흘째 날에 짐을 덜어내고, 열흘째 날에 900그램이나 나가는 니콘 D800 바디를 돌려보냈는 데도 배낭은 여전히 10킬로를 훌쩍 넘고, 배낭에 매달린 삼각대랑 간식, 물까지 더하면 12~3킬로를 지고 다녔더니 허리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나보다. 문제는 통증이 예사롭지가 않아서 살짝 아프고 말 것 같지 않고 어쩌면 순례여행을 지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기로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들게 만드는 거다. 

배낭의 문제도 큰 터라 친구가 사들고 오기로는 했지만 일주일을 더 버텨내기는 힘들겠다고, 몸이 재산인 이 곳에서 내 몸이 본능적으로 보내오는 신호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무슨 수를 내야겠다고 결론을 짓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덜어낼 것은 렌즈와 삼각대밖에 없다. 지금이야 카메라 바디가 없으니 무용지물일지라도 앞으로의 여정동안 180밀리 수동렌즈와 삼각대를 쓸 일이 있을 지 곰곰 생각해본다. 180밀리는 걷기 시작한 첫날에 시간 여유가 많을 때 사용을 했었고, 삼각대는 첫날과 다이니치지에서 사용한 게 전부다. 

그날그날 숙소가 미리 정해져 있으므로 길에서 삼각대를 펴고 이삼십분동안 사진찍을 일이 많지는 않을거다.  설령 필요할지라도 지금 당장 카메라가 없는 일주일동안은 무용지물이니 우선 24-105밀리 렌즈만 남겨놓고 삼각대와 수동렌즈를 덜어내면 2킬로는 줄겠다.


또 문제는 생면부지의 시코쿠에서 어디다가 맡기느냐인 데 민감한 렌즈를 앞의 숙소로 보내고, 다시 보내고 하면 탈이 날지도 모른다는 부담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결국엔 다이니치지의 김묘선선생님께로 연락을 드린다. 바쁘신 분이라 염치불구하고 톡으로 사정을 말씀드리니, 선생님께서는 부재중이시라 제자분 연락처를 알려주시면서 제자분한테 연락해서 우편으로 보내라고 하신다. 일단 한시름 놓고 제자분과 연락 후에 내일 발송하기로 결정을 내리니 홀가분하다. 

도중에 필요하면 보내달랄 수도 있고, 직접 찾으러 가기도 어렵지 않은 곳이라 한시름 놓는다.


오늘 일정이 비교적 짧은 거리여서 평소같으면 두세시쯤 숙소에 너끈히 도착하고도 남았겠지만 컨디션이 말이 아닌지라 4시 가까이 되어서 아와민슈쿠에 도착한다. 이번 숙소의 주인분도 90대로 보이는 할머니신데 몸도 좀 불편해 보이시고, 그래선지 숙소가 깨끗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2층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 아래에도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있다. 


2층으로 올라가서 바로 왼쪽 방을 배정받고 우선은 씻으려는 데 누군가가 노크를 해서 내다보니 중년의 여자 오헨로상이다. 피부가 까무잡잡하고 왜소한 체격에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가 씻고 나오면 바로 자기가 씻을 수 있게 알려달란다.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제일 먼저 체크인한 줄 알았는 데 나보다 먼저 온 헨로상도 있었나 싶다. 그래도 여자인 건 다행이다.


오후로(お風呂)에 오래 잠겨서 퉁퉁 부은 발과 아픈 허리를 달래고 나와 세탁기를 돌린 후에 맞은 편 방에 기별을 하니 먼저 온 여자 오헨로상도 씻으러 들어가고 주인 할머니는 오늘 예약한 손님이 우리 둘뿐이라고 6시에 저녁을 먹으란다. 

아와민슈쿠의 저녁식사. 좀 별로다

둘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제법 많은 얘기를 나눈다. 오랜만에, 아니 오헨로미치에서는 첨으로 나이차이가 크지 않은 여자 오헨로상을 만난 데다 사코상이라는 이 분, 제법 수다스럽기까지 하다. 큐슈의 최남단인 가고시마에서 왔는데 나이는 쉰에 스물네살, 스물세살 아들이 두명 있어서 하나는 도쿄, 하나는 나가사키에 거주한다고 한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에 교통사고로 발목 수술을 해서 살이 10킬로 이상 쪘다가 뺐다는 것, 지금은 한의학을 공부중인데 공부스트레스가 심하다고도 한다. 


저녁 식사 후에는 사코상의 방에서 일본어로 된 지도책을 보면서 앞으로의 일정을 짚어 보다가도 자기는 건강해지기 위해서 시코쿠에 왔는 데 여기저기 장난아니게 아프다고 약봉다리도 한아름, 말린 과일 등 간식봉다리도 한아름을 보여주고 말린 과일도 한 줌 쥐어준다.

오늘도 몸이 안좋아서 2시에 숙소에 들어와 두시간을 잤다고 한다. 하루에 20에서 25킬로 사이를 겨우겨우 걷고 있다고, 내가 꾸준히 30킬로 이상을 걸었다니 '스고이 스고이'를 연발한다. 


사코상이 가지고 있는 일본어 안내책자를 보니 매년 개정이 된데다 판형 자체가 커서 지도도 세밀하고, 뒷쪽에는 숙소만 따로 정된한 게 있어서 지난 곳은 덮어두고 앞으로 남은 구간의 숙소리스트를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저장해 둔다. 리스트에는 먼저 사전조사를 했는 지 괜찮은 숙소와 전혀 아닌 숙소, 최고인 숙소를 O,X,◎로 표시해 두었으니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일본어 지도책의 숙소리스트.두번째 열의 네모박스숫자가 88개의 사찰, A거리는 이전 절까지의 거리, B거리는 다음 절까지의 거리를 나타낸다

내일 일정은 둘 다 37번 이와모토지까지 가는 것은 같은 데, 숙소는 달리 예약한 상태다. 사코상은 이와모토지 슈쿠보에, 나는 절에서 500미터 떨어진 민슈쿠무라노이에(民宿村の家)에 아침 식사만 하는 걸로 3500엔에 예약이 되어 있으니 일단 이와모토지까지는 같이 걷기로 한다.


모레는 이와모토지에서 약 30킬로 거리인 도사구로시오철도(土佐黒潮鉄道) 아리이가와역(有井川駅)에서 조금 더 간 곳의 바닷가에 있는 호텔우미보즈(海坊主ホテル) 같은 숙소로 예약한다. 

이와모토지 이후에는 아시즈리곶까지 87킬로를 남쪽으로 남쪽으로 땅끝을 향해 내려가는 긴 코스다. 오늘까지는 스사키시, 낼은 구로시오쵸(黒潮町), 모레는 시만토시(四万十市), 그 다음이 38번 곤고후쿠지가 있는 도사시미즈시(土佐清水市)까지의 긴 여정인지라 동성의 동행이 생기니 안심이다. 

또 내일 짐도 덜 수 있으니 당장 눈 앞의 걱정거리는 모두 사라진 셈인지라 늘 잘 자는 잠이지만 오늘은 특히 편한 맘으로 잠들 수 있겠다.



아와민슈쿠(2식 포함) 6000엔

음료,식사 344엔


합 6344엔

이동거리 2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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