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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큐레이터 수첩 May 23. 2020

[박종규] 디지털-아날로그의 변주, 구축 그리고 구현

2017. 개인전 EMBODIMENT 2017/ 대구보건대학 인당뮤지엄


디지털-아날로그의 변주, 구축 그리고 구현


공간 하나. 디지털. 

디지털의 공간은 0과 1의 공간이다. 있음과 없음. 분명하고 명확하다. 박종규의 작업처럼. 


공간 둘. 작업실

대구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은 날은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쏟아질 것 같은 흐린 날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대구 앞산 언저리 꽤 오래된 단독주택들이 정갈하게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80년대 무렵, 우리 동네에도 그런 집들이 있었다. 대문 앞에선 차우차우가 손님을 맞았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담한 정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정원에는 나무 몇 그루가 있었고, 그리고 그 아래엔 벤치가 있어서 한적한 오후를 즐기기 딱 좋아 보였다. 왠지 모르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그런 양옥집 한켠에 작업실이 있었다. 새로 개조한 듯 보이는 공간은 제법 컸다. 작업실은 생각했던 것과 사뭇 달랐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빼곡히 캔버스를 에우고 있는 점과 선을 보면서 상상했던 작업실은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한 디자이너의 사무실 같은 모습이었다. 그저 막연히 노출 콘크리트의 현대적 건물일 거라 지레 짐작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그의 작업실은 운치 있었고, 괘 전형적인 화가의 작업실을 닮아 있었다. 작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의 작업 스케일에 비하면 여전히 어딘가 비좁아 보이기도 했다. 작업실에 들어섰을 땐 마침 개인전 준비를 하느라 어시스트들과 신작을 제작중이었다. 커다란 캔버스에 붙은 시트지를 무념무상 떼어내는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집중력을 꽤나 요하는 작업처럼 보였다. 


작업실 한 켠에는 2.4미터 폭의 시트지를 출력할 수 있는 플로터가 있었다. 작업실 곳곳에는 이런저런 작업의 흔적이 보였고, 한 쪽 벽에는 공구와 재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래되어 보이는 진공관 스피커는 그의 취향을 잘 보여주는 것도 같았다. 작가라면 탐낼 법한 멋스러운 작업장이었다. 전통적인 화가나 조각가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무엇보다 상당히 아날로그스러운 작업실이었다.


공간 셋. 작품

박종규는 (종종) 화가라 불린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대단히 미니멀리즘적인 추상회화라고도 불리기도 하며, 단색화의 붐과 함께 얼렁뚱땅 시류에 얹혀 읽히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그림은 상당히 절제되어 있고, 결과물로의 작품만 놓고 보았을 때, 그리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그림/회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딘지 충분치 않아 보인다. 캔버스에 물감을 사용하는 전통적인 회화적 과정이지만, 그 과정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회화적인 것, 이미지적인 것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디지털 이미지의 속성과 닿아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디지털은 0과 1로 구성된 숫자의 공간이다.0과 1. 이 두 숫자 사이에는 그 어떤 물리적인 ‘연결’도 없다. 디지털 이미지 또한 마찬가지다. 확대하고 확대해 들어가면, 픽셀로 쪼개지지만, 하나의 픽셀과 다른 픽셀 사이 연관은 없다. 다른 수치가 주어지면서 픽셀의 성격이 만들어질 뿐이다. 그런 픽셀들의 모임을 줌 아웃하여 보면 어떤 ‘형상’같은 이미지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저 그렇게 보여지는 것일 뿐. 물리적으로 ‘~ 같은’ 이미지는 사실 실제 대상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이다. 박종규의 작업은 일반적으로 줌 아웃 해 바라보이는 시선을 철저하게 줌 인하여 들어간다. 디지털의 픽셀은 점으로 드러난다. 시트지로 붙여진 점과 물감으로 칠해진 점은 언뜻 하나의 평면처럼 보이지만, 실은 평면이 아니다. 서로 다른 층위의 공간이다. 전혀 다른 물리적 속성이 만들어내는 공간이다. 다만 압축되어 평면으로 보일 뿐. 지금까지 이야기가 ‘점 시리즈’에 대한 것이었다며, 바코드처럼 보이는 ‘선 시리즈’ 역시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부르듯) 그의 회화는 그저 다른 회화랑 다른 공간이다. 그래서 ‘그리는 것’이 아닌 ‘만드는’ 활동이고, 지극히 디지털에서 출발하지만 너무나 아날로그적인 작업이다. 게다가 노동 집약적이기도 하다. 

박종규는 조각가로 불린다. 바코드 같이 보였던 선 시리즈가 입체로 만들어져 설치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그의 조각은 재료의 물성이나 형태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입체는 일반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디지털’이미지의 경험을 물리적인 것으로 환원시켜보려는 호기심이자 평면작업에서 만들어내었던 ‘디지털적’ 이미지의 철저한 아날로그적/물리적 변주이다.


그리고 박종규는 (종종) 미디어아티스트로 불리기도 한다. 풍경을 아스키 코드로 바꾼 영상작업이나 LED 패널로 이어지는 영상작업,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도형 작업, 최근 시도했던 홀로그램까지 다양한 최신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면에서 미디어아티스트라고 불려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를 ‘미디어아티스트’라 부르기가 어딘가 조심스럽다. CCTV를 사용하고, 멀티채널을 활용하기는 하지만, 그의 주된 관심이 최신 미디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양한 매체를 쓰는 것은 그가 느끼고 경험하는 디지털 공간의 특성을 좀 더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지, 미디어 자체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박종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매체가 달라지고 표현형식이 바뀌어도 그가 가지고 있는 관심은 일관적이다. 그래서 다양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산만하지 않다. 오히려 동일주제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대신하여 감상의 즐거움을 더한다. 깊숙이 줌 인 해 들어간 ‘만질 수 없는’ 디지털의 공간과 최소한의 기본단위를 가지로 평면으로, 입체로 나아가 미디어로의 활용은 결국 하나의 주제에 대한 변주곡이다. 

2017 인당뮤지엄 전시전경

예술적 오류, 노이즈에서 다시 기본인 선과 점으로

박종규의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오류와 노이즈로 축약된다. 박종규의 작업을 ‘노이즈’로 보는 데(황인, 윤규홍)에 대한 한계를 지적했던 백곤의 입장에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백곤이 지적하듯 박종규의‘예술적 오류’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의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노이즈’는 주된 주제/정보에서 벗어나는 잡음, 여타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렇다고 볼 때, 박종규의 작업은 확실히 노이즈에 대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그의 작품이 기존의 모노크롬 회화나 팝아트, 하이퍼리얼리즘 회화들에서 제거되었던 회화에서의 노이즈를 복권하려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회화(평면)가 사유의 판단이 대상과 일치하지 않는 실질적 오류에 해당하며, 이러한 그의 오류가 사회를 바라보는 작가의 예술적 시선에서 출발하고, 때문에 그의 오류는 인식을 위한 것이고, 새로움의 생성이 아닌 비균질한 체계를 발견하는 과정을 지향한다는 입장(백곤)은 작품의 제작 동기와 박종규가 작업을 하는 의미를 찾는 데에는 적절한 이해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그의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인 과정과 결과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듯 보인다. 특히 최근 작업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일관된 관심사와 물성에 대한 것으로 디지털적 이미지와 공간을 물리적이고 촉각적으로 구현하는데 더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박종규의 작업을 다시 기본으로 돌아간 선과 점에 대한 집중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의 최근 그의 작업은 (심지어 영상작업에서도) 선, 점, 그리고 색의 조합과 구성으로 압축된다. 선, 점, 색은 시각예술의 기본요소이기도 하지만, 디지털 세계의 기본이기도 하다. 비록 그것이 직접적으로 0과 1이라는 숫자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물감과 형태, 시트지의 오려붙임으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공간의 기본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때문에 그의 작품의 출발이 사진에서 시작되었고, 그 사진을 최대한으로 확장시켜 줌 인 해 들어간 결과 개별적인 사진의 정보는 모두 삭제되고 남은 픽셀들의 조함일 뿐이다. 그래서 관람객은 가의 작업을 통해서 보이는 형식적인 구성 외에는 이미지의 원래 출처에 대한 그 어떤 정보고 얻을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점과 선으로 ‘구축’되어 새로운 ‘공간감’이 생겨난다.  그것은 시각의 기본으로, 디지털의 기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mbodiment 구현/재현/

그는 이번 개인전의 제목을 <Embodiment>로 정했다고 했다. 구현, 재현, 화신...우리말로 번역하기 까다로운 단어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통해 디지털의 요소들에 대한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구현으로 유추해 볼 수 있겠다. 그의 작업에 참 잘 들어맞는 단어다.


공간 넷. 전시장

글을 쓰는 동안 전시 디스플레이를 끝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이 몇 번 더 만나고 싶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런데 막상 전시를 보지 않고 글을 마무리하자니 많이 찜찜했다. 월요일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로 향했다. 기차는 미끄러지듯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기차에 속도가 붙으면서 창밖 풍경들이 빠르게 미끄러져 갔다.


1 전시장에 맞은 것은 흥미롭게도 아스키 코드들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스키 코드들이 만들어낸 풍경처럼 보이는 이미지의 흐름이었다. 마치 달리는 기차의 창밖풍경과 닮아 있는 그런 풍경. 맞은편에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보았던 듯 한 디지털 코드들들이 선으로 이어지며 흘러가는 영상이었다. 아침 기차를 타고 오며 보았던 이미지들의 흐름과 이어지는 묘한 느낌이었다. 


이어지는 전시 공간에는 박종규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인식되는 평면작품들이 있었다. 거의 동일한 사이즈의 캔버스들 작업으로 구성되었다. 바코드를 닮은 세로 선과 점, 가로선들로 가득찬 캔버스들이 연이어 서로 다른 리듬감을 만들어내었다. 글로시하게 처리가 된 색면과 매트한 색면의 만남은 이질적 재료의 낯선 조화를 만들어내는 동시에 아주 얇은 공간의 층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분명 평면 작품들이었는데, 반복되는 점과 선의 규칙은 어딘선가 음악이 흘러오고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전시장을 가득 메운 영상작품이었다. 작은 점들의 구성이 폭포처럼 떨어지며 무중력의 공간을 떠다니다 선들의 유영으로 이어지는 영상 안에는 박종규의 작업의 모든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시는 바코드를 연상케 하는 선 작업의 철 입체 조형과 그것의 그림자 혹은 흔적으로 해석되는 시트지가 바닥에 설치되어 있었고, 전면에는 대형 LED 조명판에 드론의 시선에서 촬영한 영상이 소개되었다. 


모니터 영상에서 시작하여, 평면, 프로젝션 그리고 다시 입체와 평면, 영상으로 이어졌다. 그 모든 것을 관통해서 박종규의 주된 관심사 디지털 데이터에서 시작하여 그것이 물성(아날로그)으로 변화하는 모습들이 잘 드러났다. 그래서 각 전시장은 연주곡의 한 마디를 구성하는 듯 보였고, 전시를 관람하는 것이 주된 마디의 다양한 변주처럼 느껴졌다. 개별 전시장을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물화된 공간을 구축해냈다. 그 공간 안에서 작품을 눈으로, 그리고 귀로 보았다.


다음 변주를 향해

작품 하나로 완결되는 작업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되면서 다른 작품들과 만나 새로운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작품도 있다. 박종규의 작업은 후자에 가깝다.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결성도 충분하지만, 그것이 다른 작품들과 공간에서 만나 새로운 국면을 펼쳐나간다. 물론 그 스토리는 내러티브라기보다는 리듬, 율동, 멜로디에 가깝다. 그래서 어떤 공간과 만나느냐는 무척 중요하다. 인당미술관에서의 <Embodiment>는 꽤 성공적인 변주였다. 다른 공간에서 그의 다른 작업들이 또 어떤 변주를 만들어낼지 벌써 궁금해진다.


전시전경: https://youtu.be/XH31dnin8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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