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생일이었다. 설 당일과 생일이 겹친 건 처음인 듯하다. 오랜만에 가족과 생일을 보냈다. 지난 7년동안 생일을 거의 혼자 보냈다. 그래선지 어떻게 그날 하루를 보냈는지 기억이 안 날 때도 있다. 매년 거의 비슷했을 테니까.이젠 나이도 있고 생일이 평일이면 그냥 쳇바퀴 돌듯 똑같은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다. 기억나지 않는 게 당연하다. 근데 솔직히 어릴 때라고 특별히 더 기억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이제 나이도 많이 먹었고 수십번생일을 보냈으니.
아, 돌아보니 기억이 나는 생일도 있다. 2017년, 2018년, 2019년은 기억이 안 난다. 돌아보니 2020년에는 가족과 보냈다. 어떻게 보냈는지는 떠오르지 않고 본가에서 있었던 것만 떠오른다. 2021년은 또 기억이 없다. 2022년에는 하루종일 작업하다 저녁에 공연을 봤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나와 생일이 같은 배우 생일 카페도 가고, 증정용 재관 카드도 교환하고, 다이소에서 커피 원두 내리는 도구도 샀고.
2023년은 작년이니 기억이 더 선명하다. 이종사촌 언니와 점심을 먹고, 저녁에 공연을 봤다. 뮤지컬 이프덴. 꽉찬 서사와 감동적인 드라마에 깊은 인상을 받고 기분좋게 귀가했다. 오랜만에 사람들과 연락도 하고. 생일 케이크는 데르뜨 미니치즈 케이크를 여러 개 모아서 촛불 붙이고. 뮤지컬 더라스트맨의 넘버 '해피 버쓰데이 투미'를 들었다. 생일 축하 곡 치고 짠한 곡이지만 인생길 한복판에 나 혼자임을 생각하면 와 닿고 짠한 곡.
올해는- 집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언니가 싱가포르 가서 사온 바샤 커피를 내려마시고 송편과 약과, 천혜향을 먹었다. 중간 중간 연락이 와서 답장하고 어떤 대화는 길어졌는데 예전 상사 분이 연락주셔서 오랜만에 엄청 어르신과 대화하는 거라 딴에는 더욱 더 섬세하게 말을 골라가며 답장을 썼다. 이제 다른 업계에 있기도 하고, 나도 다른 동네 분위기에 적응돼서 혹시라도 말실수할까봐 조심했다.
책을 좀 읽다가 가족들과 같이 영화관에 갔다. 영화는 아니고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특정 정치 성향을 타는 내용이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처음에는 컸지만 나쁘지 않게 봤다. 내용에 완벽하게 동의하는 건 아니고, 사실 잘 모르는 이야기고, 내 정보도 온전하지는 않아서 뭐라 반박하기도, 동의하기도 그랬다. 그냥 난 몇개월만에 만난 가족과 4년만에 생일을 함께 보내는 데 의의를 뒀다. 내가 어릴 때 부모님도 어린이용 만화를 참고 보셨을테니까. 그런 것과 비슷하게 생각했다.
귀가해서 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고 언니와 올리브영에 다녀왔다. 오늘 너무 실내에만 있어서 좀 걸어야겠다 싶어서 광장까지 걸었다. 언니가 폼 클렌저와 클렌징 오일을 샀다. 돌아와서는 옷 갈아입기 전에 생일 축하하자길래 케이크에 초를 꽂고 불을 직접 붙였다. 이번에는 언니가 글자로 된 케이크를 샀는데 해피 버쓰데이 글자가 제법 길어서 불 붙이는 데 시간이 걸렸고 초도 두개나 썼다.
고마웠던 건 언니가 저녁에 빵집에 가면 케이크가 별로 없을까봐 오후에 짬을 내서 미리 사다준 거였다. 덕분에 보기에도 예쁘고 먹음직한 케이크를 샀고, 참 맛있었다. 과일도 많고. 사실 며칠 전에도 회사에서 생일을 미리 축하해줬는데 그때도 맛있는 케이크를 받아서 참 감사했다. 회사에서 생일을 축하받은 건 사실상 처음이었다. 사실상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다.
사진=딱정벌레
그전 회사에서는(정확히는 모회사에서) 사내 모니터로 축하받았고, 생일자마다 돌아가면서 출입문 옆 큰 모니터에 프로필 사진과 함께 생일을 띄워줬다. 인원수가 많고 서로 잘 모르다보니 그렇게 기념한 것 같은데 직접 인사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지 생일 공지 의미로 와닿았던 것 같다.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일인데 당시 프로필 사진을 좋아하지 않아서 민망한 마음이 가득했던 기억도 난다.
아무튼 가족과 축하하고 아버지가 덕담을 해주셨다. 더 발전하길 바란다고. 생일과 설이 겹치는 건 드문 일이라는 이야기와. 나는 설을 기념해서 준비한 그 무언가를 부모님과 언니에게 각각 나눠드렸다. 어제 다이소에 가서 봉투를 샀는데 명절 연휴나 어버이날이나 요맘때 기념 봉투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예쁜 봉투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고. 마냥 받기보다 나눌 수 있어서 감사했다.
케이크를 먹고 아버지가 주시는 화랑도 한잔 마시고 트로트 프로그램을 봤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 한명 있어서 봤는데 여린 이미지인줄 알았는데 그렇게 우렁찬 소리를 내는 줄 미처 몰랐다. 왠지 마지막 경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선지 부담도 있었던 듯하고 역시 노래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 훈련된 사람이라서 그런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곡을 잘 소화했다. 무대에서 더 많이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니에게서 생일 선물을 받았고 언니가 사진도 같이 찍어줬다. 생일 촛불을 끌 때도 언니가 사진을 촬영해줬는데 생각해보니 이런 모습을 누가 찍어주는 것도 무척 오랜만이다 싶었다. 오늘 눈화장을 안 해서 초췌해보였지만(눈화장에 많이 기대며 살고 있음을 눈화장 안할 때 실감한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남겼다 생각하고 의의를 뒀다. 식구들은 각자 자리로 쉬러 가고 난 거실을 독차지했다.
김구 선생님이 갑자기 생각나서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해봤다. 인상깊었던 사진이 있는데 바로 사모님 묘비였다. 묘비 문구는 순우리말로 쓰였는데 출생연도와 날짜, 사망연도와 날짜를 쓴 부분이 독특했다. 숫자를 ㄱㄴㄷㄹ 순서로 각각 표시했고, 사모님 이름과 무덤, '남편 김구가 세움'이란 문구가 순우리말로 적혔다. 그걸 보고 옛날에는 무덤을 '묻엄'이라고 쓴 사실도 처음 알았다.
기억에 남는 또다른 점은 가족들이 묘비 옆에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는 점인데 어린 자녀들의 표정은 모르겠지만 김구 선생님은 사진이 어두워서 표정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를 너무 슬프게만 받아들이시지 않는 듯 보였다. 어쩌면 이것도 아내와 함께 하는 가족 사진일 수도 있는데 '지금도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인상이 와 닿았다. 묘비에 남편이 묘비를 세웠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도 돈독함이 느껴졌고.
언젠가 윤동주 문학관에서 윤동주 시인의 장례 사진을 본 적 있다. 그때도 집 앞에서 온 가족이 상복 차림으로 사진을 함께 찍었는데 그게 인상깊었다. 간혹 가족장을 치르고 묘소에서 가족과 친인척이 함께 사진을 찍은 사례를 본 적 있긴 하다. 그건 굉장히 큰 극복이고 어쩌면 인내인데- 내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게 잘못돼서가 아니다. 슬픔을 누르고 그 감정을 넘어서는 게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현장을 사진으로 남긴 가족이 대단했다. 세상에 비극적이지 않은 죽음은 없지만- 윤동주 시인은 굉장히 고초를 겪다가 너무도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으니까. 가족에게 너무도 슬프고 상처인 일인데 그걸 너무 비극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마지막으로 떠나는 그 순간도 함께 기억하고 기념하려는 그 모습이 짠하고 울컥했다. 가족이 이 순간을 무척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긴다는 생각도 들고.
사진=딱정벌레
생일 일기를 쓰는데 참 다양한 이야기를 한다. 아무튼 그러고 생일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해피빈을 살펴보다 어떤 곳에 기부를 했다. 내가 누리는 것에 비하면 너무 약소한 금액이다. 이런 걸 안 한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도 들고. 올해는 더 활발히 기부하고 나누길. 해피빈 기부 목록을 내려다보며 세상에 참 다양한 곳에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요즘 생각하는 일 중 하나는 제주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해보는 거다.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일을 기부라서 제주에는 어떤 곳에 기부할 수 있는지 찾아봤다. 제주 현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걸 보는데 해피빈에는 학대 어르신을 지원하는 기부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기부가 해피빈에 등록된 건 아니라서 해피빈에 없는 기부처도 더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카카오 같이가치도 봐야겠다.
제주 현지에 직접 도움을 주는 건 아니지만 어려운 이웃에게 제주도를 여행할 기회를 지원하는 기부 활동도 있었다. 몸이 불편하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제주도를 여행하기 부담스러운 사람들. 이런 기부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새삼 제주도에 가고 싶어도 경제적 이유로 갈 수 없는 사람이 이렇게 많구나 실감도 나고. 내가 누린 기회는 정말 귀하고 흔치 않으며 어려운 기회임도 깨닫게 되고.
제주에 마음이 생긴 건- 지난해 회사 일로 제주도를 두번 다녀오면서 이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지 않을까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가장 손쉽고 빠른 방법은 기부일텐데 기부도 잘 알아보고 해야 하고. 여러가지를 고민하고 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데 기부는 좋은 활동이니 강요하지 않되 권장할만한 일이고. 조직과 제주가 인연을 맺기 시작했으니. 좋은 인연이 되면 좋겠고.
이렇게 찾아본 뒤, 말씀을 묵상했다. 생월인데 2월도 그렇고, 지난 1월도 그렇고 말씀을 제대로 묵상하지 않는 하루가 많았다. 생일마저 그럴 수 없으니. 이번 주 못본 말씀을 몰아서 봤다. 오늘 생일 QT의 핵심 메시지는 '깨어 있으라'였는데 생일에 꼭 필요한 말씀이란 생각이 들었다. 많은 말씀이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돌아서면 까먹는 메시지도 참 많다. 생일이니 말씀을 보고 싶었다.
나와 생일이 같은 배우 팬카페에 생일 축하 메시지도 올리고. 벌써 몇년째 하는 일. 나와 생일이 같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좋아하는 배우가 생일이 같은 건 팬으로서 특히 의미있고 반가운 일이라. 다른 팬에게 과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빈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고 더 축하하고 싶었다. 그냥 응원하는 의미가 있다. 큰 문제 없이 건강하게 잘 살아서 매년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한 일이고.
독서를 조금 하고, 생일 일지를 남기고 싶어서 이렇게 글을 썼다. 금방 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꽤 흘렀네. 오늘 예상치 못한 연락을 받기도 하고, 늘 한결같은 연락에 무척 감격하고, 사람들에게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을 자주 못 봐도 기억해주고 생각해주고 배려해주고 챙겨주는 그 마음 씀씀이가 너무 고맙고 오랫동안 보지 못한 사람들을 보고 싶고 더 늦기 전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절과 생일의 깨달음. 이 하루가, 이 인연은 결코 당연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