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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Sep 01. 2018

가장 막막할 때 가장 많이 자란다

성장앞에서 마주한 두려움을 견딜 수 있다면

 핏덩이 같던 갓난아기가 마침내 제 두 발로 걷게 되었을 때의 순간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그 한 발짝의 희열. 두 손은 허공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금세 주저앉기 일쑤지만 그 위대한 발걸음을 목격한 사람들은 감격을 잊지 못한다. 황홀한 성장의 순간이다.


성장은 '더 잘 보게 되는 것'의 다른 말

행복에 대해 논할 때도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성장'이다. 스스로 발전하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행복하다. 과거의 나보다 좀 더 나은 나를 보면 누구도 예외 없이 기쁨을 느낀다.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희망적인 느낌이고 기대하게 만들며 기분 좋게 한다. 오롯이 집중하는 몰입(Flow)의 상태가 긍정적인 정서를 주는 것은, 발전하고 성장할 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어 다니던 아기가 두 발로 걷게 되면 자연히 확장된 시야를 갖게 된다. 더 높은 곳에서 더 넓게 볼 수 있다. 그처럼 성장은 '더 잘 보게 되는 것'의 다른 말이다. 성장한다는 것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는 것, 더 큰 세상으로 시선을 넓혀가는 것, 나 자신을 제대로 보게되는 것이다.


지식은 두말할 것도 없고 경험 또한 많이 쌓기만 한다고 성숙한 사람이 되게 하지는 않는다. '나는 이런 것까지 겪어본 사람이야' '너같은 애송이는 내 말만 들으면 돼'와 같은 태도로 타인을 대한다면 그 경험은 지혜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지혜로 녹여내지 못하고, 타인을 가르치려 들거나 통제하는 도구로 삼는다면 그 경험은 오히려 독이다.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고, 자신보다 경험이 적은 사람을 폄하하는 어른들을 우리는 '꼰대'라고 부른다. 아마도 소중한 경험을 통해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세계가 나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늘 타인과 나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남겨둔다. 경험을 통한 멋진 성장이 가진 힘은, 타인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던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독설이 아니라 꼭  필요한 손길을 적재적소의 순간에 줄 수 있는 힘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소박한 모습으로 늘 가까이에 있다. 상처 입은 사람만이 마음 다해 다른 이를 치유할 수 있다는 칼 융의 말처럼, 자신이 겪은 일들을 자원삼아 주위에 따뜻한 힘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보다 부족한 사람들이 더 많이 나누는 것도, 가난의 고통을 겪은 사람만이 그 고통을 제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을 잃어야 길에 이른다


내적 성장이 생의 화두였던 작가 헤르멘 헤세는 그의 고민을 작품곳곳에 녹였다. 그의 소설마다 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장해나간다. 그런데 그들이 겪어내는 성장의 지점은 그리 세련되어 보이지 않는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의 경우를 보자.


 한스는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전혀 다른 하일너를 만나면서 그가 지켜오던 규범들에 균열이 일어난다. 하일너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 자신이 억압하는 것들을 거리낌 없이 즐기는 하일너를 보며 한스는 내심 부러워하면서도 경계한다.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의 안전한 세계를 깨부수기란 쉽지 않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었지만 끝내 용기를 내지 못하고 결국 영영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는 그는 신경쇠약에 시달린다. 하일너와는 멀어져버렸지만 이미 그를 통해 자신의 삶에 의심이 들었고, 방황을 시작한 것이다. 급기야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새로운 삶에 발을 디딘다.


이상에서 벗어나 현실을 하나씩 마주하며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 어렸을 때 보던 세계와, 하나씩 배우고 체험하면서 마주하는 세계는 사뭇 다르다. 그 현실은 때로는 날카롭고 냉혹하다. 따라서 '잘 보는'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상에서 현실로의 발돋움이며,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그러했듯 알을 깨는 몸부림이다. 그 과정에서 계획대로 이뤄가기보다는 계획에 없던 무언가를 맞닥뜨리게 된다. 또한 자신에 대한 실망과 세계에 대한 의심을 마주한다. 자신을 깨우는 것은 예상치 못한 만남이나 이별을 통한 아픈 감정일 수도 있다. 매끄럽고 보기 좋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동반한다. 그 안에서 내가 모른 체하던 그림자를 마주하면서 또 다른 나와의 싸움 혹은 타협이 일어나기도 한다. 성장으로 인한 행복감을 느끼기까지는 그런 우여곡절이 어쩔 수 없이 선행하는 것이리라.



감정의 격랑을 견뎌낼 용기를 잃지 않기를


요즘은 매체에도 서점에도 자기계발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살아 있는 한 발전하는 사람이고 싶다. 적어도 어제보다 더 못난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성장은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만은 아니다. 성장으로 인한 즐거움은 기꺼이 누리고 싶은 개개인의 진정한 바람이다. 중요한 것은 성장통 없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길을 잃지 않고는 길을 찾을 수 없다. 성장은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혹은 경험만으로는 완전하게 이룰 수 없다. 한스가 타인을 통해 자신에 대한 의심을 시작한 것처럼 부딪히고 방황하는 시간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정체되고 위축되는 시간처럼 느껴질 뿐이다.





<신곡>의 첫 문장이기도 한, '인생 중반에 이르러 길을 잃고서 어두운 숲을 헤맸다'는 단테의 말을 기억해본다. 길고 긴 여행은 그렇게 헤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것이 아마 진정한 성숙을 향해 가는 길일 것이다. 나의 긴 여정에서도 언제든 길을 잃거나 불안과 의심을 마주할 수밖에 없겠지만 이제는 당황하지 않을 것 같다. 순탄했던 길이 어느 순간 너무나 낯설고 어지럽게 느껴질 때, 자신만만했던 길이 문득 막막하고 불확실함이 무겁게 느껴질 때,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을 때 진정한 성장이 시작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타인이 찾아주는 답에 기대지 않고 홀로 두발을 내디뎌보기를, 감정의 격랑을 견뎌낼 용기를 잃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모든 성장이 실은 길을 잃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으니까.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되는, 그 성장의 환희를 맛보는 길에서 절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래전에 마침내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던 것처럼 우리는 꼭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 위 글은 책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에 실린 "가장 막막할 때 가장 많이 자란다"라는 제목의 글을 약간 수정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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