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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25. 2018

인생에 정말 '운'이란게 있을까

당신만의 '운수 좋은 날'을 위하여


과연 ‘운’이라는 게 존재할까. 미래를 알 수 없는 우리는 늘 운세를 궁금해하고, 돈을 주고서라도 나의 운을 점쳐보려고 한다. 세상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애써 세워놓은 계획도 흐트러지기 십상이니 어쩌면 우연의 힘이 더 크다고 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 우연의 힘이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잘 풀려나가기만 한다면, 그걸 ‘행복’이라고 볼 수도 있을까. 실제로 사전에 나와 있는 행복의 첫 번째 뜻은 ‘복된 좋은 운수’다. 



다만 너무 멀리 갔다 왔을 뿐 


어른이 되어 다시 읽게 된 소설 《노인과 바다》는 새삼스럽 게도 운이라는 주제를 내게 새로운 생각거리로 던져준다. 몇 달째 고기 한마리 낚지 못한 고기잡이 노인 산티아고를 보고 사람들은 불행에 처한 ‘살라오’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살라오란 ‘운이 다한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라틴 아메리카의 속어다. 아닌 게 아니라, 노인을 좋아해서 항상 그와 함께 배를 탔던 소년 마놀린에게, 소년의 부모는 노인의 불행을 이유로 다른 배를 타라고 한다. 마놀린은 다른 어부의 배를 타고서는 괜찮은 고기를 세 마리나 낚았다. 노인과 배를 탔 을 때는 한 마리도 낚지 못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소년은 ‘산 티아고 영감님~’ 하며 그를 여전히 좋아했고, 빈 배로 돌아 오는 노인의 일을 거들었다. 다른 어부들이 산티아고를 놀려 댈 때에도, 소년은 믿음과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 보며 늘 좋은 말동무가 되어준다. 



어느 날, 오늘은 느낌이 좋다며 홀로 먼바다에 나간 산티아고는, 정오 무렵 미끼를 문 어마어마한 크기의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게 된다. 그에게 커다란 청새치는 거대한 꿈이며 그동안의 불운을 깨끗하게 씻어줄 성공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틀 밤낮을 씨름하여 마침내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배 옆에 거대한 고기를 묶어 집으로 가는 길, 또 한 번의 역경에 부딪힌다. 청새치를 향한 상어들의 공격 이었다. 청새치를 잡느라 낚싯줄에 손바닥 살이 벗겨져나갈 만큼 체력을 거의 다 쓴 노인은, 다섯 마리 상어를 간신히 처치한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청새치의 앙상한 뼈와 머리, 지느러미뿐이었다. 

노인은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 데에 성공했지만, 상어의 공격으로 결국 청새치의 뼈와 지느러미만 남게 되었다.

 


어째, 일이 너무나 잘 풀리더니만. 그가 생각을 이어갔다. 꿈이 라면 얼마나 좋을까. 고기를 낚지도 않았고, 신문지를 깐 침대 에서 그냥 혼자 누워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에서 



18피트나 되는 길고 큰 뼈와 지느러미를 보고 사람들은 놀란다. 비록 청새치는 상어 밥이 되어버렸지만, 노인의 운 이 결코 다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고 봐야 할까. 그는 육지에 돌아와, 마놀린과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면서,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소년 마놀린을 간절 히 그리워했다. 또 소년과 대화를 나누던 여유로운 시간을 떠올렸다. ‘아이가 곁에 있다면 좋으련만. 나를 돕기도 하고, 이걸 함께 볼 수도 있고 말이야.’ ‘아이가 여기 함께 있으면, 낚싯줄에 물을 묻혀 쓸리지 않게 해줄 텐데. 그래, 아이만 곁에 있다면 바랄 게 없을 거야. 아이가 곁에 있으면 좋으련만.’ 망망대해에서 이렇게 혼잣말을 여러 번 되뇌던 그였다. 



마침내 돌아와 마놀린과 대화를 나누는 그는 정말 평화로워 보인다.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 가까이에 이미 있었는데, 그는 왜 그렇게까지, 목숨을 내놓고 거친 싸움을 해야만 했을까. 물론,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온 열정을 쏟아부은 그 집념은 존경스럽고, 그렇게 잡은 고기를 제 자신처럼 여기며 지켜내려 했던 모습도 아름답지만 말이다. 산티아고는 빈손으로 돌아온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진 게 아니야. 다만 너무 멀리 나갔다 왔을 뿐이야.’ 

그리고 누군가 함께 이야기할 상대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 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노인과 소년 마놀린. 출처 영화 <노인과 바다>


너무 멀리 나갔다 왔을 뿐이라는 그의 말을 곱씹어본다. 인간은 기어이 선을 넘어보아야만, 그제야 자신이 지나쳤던 소중한 것을 깨닫는 욕망의 동물인 걸까. 소중한 것은, 늘 그 렇게 격정을 퍼부어야만 지켜낼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사람들은 몇 달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그를 두고 ‘운이 다한 사람’이라고 말했었다. 산티아고는 큰 물고기를 잡아 옴으로써 그 운이 다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그것을 확인시키고 싶었을지도 모르 겠다. 하지만 바다에서 돌아온 후 소년을 보며 자신은 운이 다한 게 아니라, 진짜 행운을 이미 가까이에 두고 있었음을 깨달은 듯하다. 그것은 바로 마놀린과 함께하는 시간, 또 그가 보여주는 신뢰다. 행운은 격정적으로 쟁취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노인에게 소년의 존재와 같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무엇은 아닐까. 그것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그럼에도 주위에는 너무 멀리 나아가는 사람이 많다. 한 방의 무엇을 기대하며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선을 넘는 일들은 허다하다. 심한 갈증을 채우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르겠으나 과도한 것, 지나친 것은 늘 함정을 지니고 있다. 집착은 대개 결핍에서 기인한다. 자신이 집착하는 것을 살펴보면 그 아래에 결핍이 자리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모르면 ‘적당히’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내면을 오롯이 이해하는 작업은, 무언가에 의도치 않게 집착하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도를 넘지 않는 지혜 


기대치 않았던 기쁜 일은 사람을 들뜨게 한다. 가끔은 이런 좋은 일이 내게 생겨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일들 앞에서는 멈칫하게 된다. 내가 비관론자여서가 아니다. 마냥 흠뻑취해 기뻐하고 자랑할 수 없는 것은 겸손이라는 좋은 단어로 포장할 수도 있겠지만, 삶이 늘 좋은 일로만 연결될 수 없음을 이제는 알기 때문일 것이다. 동화 속 세상처럼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라는 결말이 현실에서는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새옹지마는 당연한 삶의 법칙이다. 풍성한 열매를 수확하고 나면 거친 겨울이 오는 게 자연의 순리이듯이 우리 삶에도 희로애락이 무작위로 등장한다. 그런 순리를 받아들이고 나면, 왠지 모르게 차분해지는 것 같다. 가만히 앉아서 요행을 바라는 어리석음도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리스의 ‘델포이’는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마다 찾는 신전이었다. 델포이 신전의 한 기둥에는 ‘메덴 아간(Meden Agan)’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다. ‘그 어떤 일도 지나치거나 치 우쳐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무슨 일이든 도를 넘지 말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 적당함의 선을 알고 행동으로 지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세련된 지혜가 아닐까.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한 말과 행동도 그 것이 도를 넘는 순간 좋은 뜻을 잃어버리고 만다. 듣기 좋은 말도 지나치면 오해를 불러올 수 있으며, 심지어 사랑도 지나치면 관계를 무너뜨린다. 


또한 인간의 감정이야말로 지나치고 치우치면 결코 평화로움을 유지할 수 없는 대표적인 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격한 분노가 갈등을 가져오거나, 걷잡을 수 없는 질투심이 사람을 망쳐버린 사례는 얼마나 많은가. 욕심과 호기심은 지나칠수록 그야말로 쓴맛을 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마음이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삶을 즐기게 된 주된 비결을 자신에 대한 집착을 줄이는 것에서 찾았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가 절제의 윤리를 강조한 것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용이 중요했던 것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격하고 뜨거운 열정이 주는 수확도 물론 아름다울 것임을 안다. 하지만 조금 힘을 빼고 고요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보는 것은 어떨까. 끊임없이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쾌락을 가져다 준다고 믿는 이들은 항상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삶의 완벽한 상태를 상정해놓고, 그에 계속 맞춰가려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만 힘을 빼고 생각해보면, 진짜 기쁨은 완벽한 삶이나 성공에서 오는 게 아니라 ‘충분히 좋은’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함이 아닌 충분함이 주는 여유가 삶을 한결 더 온화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인간은 차분함을 늘 유지할 수 있을만큼 본디 현명한 존재는 아니다. 사회가 부추기는 ‘성공’이나 ‘대박’과 같은 단어가 주는 유혹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너무 먼바다로 나아가 있거나 적정선을 지나쳐버리는 함정에 빠지고 만다. 가끔은 향락이나 쾌락보다 인간을 타락시키기 쉬운 게 ‘성공’에 의 맹목적인 갈망이 아닌가 싶다. 그 또한 시행착오처럼 좋은 깨달음이 된다면 천만다행이지만, 그러는 동안 정작 노인의 망가진 손을 보며 울어주는 소년 같은, 따뜻한 행운을 놓쳐버리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가까이 있는 행운을 보지 못하고 너무 멀리 나가는 우를 범하지는 않는지, 격한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아프게 만들지는 않는지 늘 살펴볼 수 있다면 좋겠다. 산티아고에게 마놀린이 항상 함께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운’ 은 이미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행운은 어느 순간 찾아오는 게 아니라, 살아가며 발견해가는 것이라 감히 믿어본다. 가깝고도 고요한 우리들의 ‘운수 좋은 날’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라며. 




안녕하세요 독자님,

드디어 서서히 여름이 물러가는 게 느껴지네요.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가 정식 출간되었습니다. 이제 온라인 뿐만 아니라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책을 만날 수가 있어요.

글을 쓰는 동안 행복에 대해, 기쁨에 대해, 즐거움에 대해 마음껏 생각하고 고민하고 글로 써낼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를 '완성'한다는 것은 늘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럼에도 기쁘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살면서 꼭 한번은 마주해야했던 질문들과 함께했고, 그 질문들이 결국 저를 더 성장시켜 주었기 때문이겠지요.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가 일상의 결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준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미 저에게는 큰 기쁨이 되어준 책입니다. 이제는 독자분들에게로 가서 기쁨이 되어주기를 바랍니다.



스물다섯개의 글들은 아래처럼 다섯개의 챕터로 나누어져있습니다. 


어떤 글은 오히려 고통이나 괴로움,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모르는 상태로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반쪽자리일테니까요.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더라도 책에 담겨진 마음이 많은 이들에게 전해질 수는 있을 겁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이 기쁨의 에너지를 주위에 전염시킬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노인과 바다>속의 소년 마놀린이 노인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에게 아주 가까운 행운이 되어줄 수 있다면 가능할거라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버텨내는 삶'이나 혹은 미움이나 짜증으로 채워가는 일상이 아니라,  기쁨으로 길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기쁜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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