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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18. 2018

꼭 사랑받지 못해도 나는 나답게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기쁨

2년 전쯤 반려견이 사고로 죽었다. 10여 년간 동고동락한 강아지였다. 그 일을 떠올리면 늘 죄책감이 섞인 슬픔을 느낀다. 가장 미안했던 것은 함께하는 동안 개가 개답게 지내도록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다리가 길어 점프력이 상당했고 긴 다리만큼이나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걸 좋아했다. 가족들은 틈이 나면 그와 산책을 하긴했지만, 어른들의 삶이란 게 그렇듯 모두가 바빴다. 오로지 강아지만을 위한 일상을 만들기란 어려웠으므로 산책은커녕 집을 한나절 비워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홀로 긴 시간을 보냈다. 내내 엎드려 대문 밖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고, 잠이 들 때면 꿈속에서나마 자유롭게 뛰어다녔을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를 그토록 좋아하는 강아지가 더 오래 뛰어놀 수 있게 해주지 못한 것, 좋아하는 냄새를 실컷 맡게 해주지 못한 것, 사람을 무척 좋아하는 그를 자주 혼자두었던 것, 그러니까 '개를 개답게' 해주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무엇보다 애초에 우리의 기쁨을 위해 데려온 생명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미안했다.



태어난 대로 살지 못하는 비극


그때의 안타까움이 컸기 때문일까. 이후 많은 동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자신의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동물들이었다. 고래가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지 못하고 냉동생선을 받아먹으며 공연장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고, 야생동물 라쿤이 홍대의 이색카페에서 사람들의 손을 타서 스트레스로 아파하기도 한다. 더 속상한 것은 이런 일이 단지 말 못하는 동물들만의 얘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창 뛰어놀며 웃고 떠들어야 할 아이들이 학교가 끝나기 무섭게 학원을 전전하다 어두워져서야 집에 돌아간다. 한창 자유를 만끽할 대학생들이 신입생 때부터 토익학원을 다니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한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의 심리적 압박감이 어마어마하다는 기사를 보며 씁쓸함 이상의 연민을 느꼈다.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어른이 된다고 해서 제 모습대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만큼 살아내느라, 또는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을 갖추느라 고군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꽤 그럴듯한 모습이지만 모두가 비슷비슷한 풍경 뒤에는 다양한 모습의 개인이 감추어져 있을 테다.


 어쩌면 모든 생명체의 스트레스는 태어난 유전자대로 살지 못하는, 그러니까 개가 개답게, 돌고래가 돌고래답게, 인간이 인간답게, 내가 나답게 살지 못하는 데에서 유발된 것이 아닐까. 본능이 시키는대로 먹고 싸고 충동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온전한 자신이 되어, 능동적으로 자신만의 강점을 찾고 발현하며 사는 방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조금 더 진솔한 삶의 방식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획일화된 삶의 매뉴얼을 따르면서, 또는 사람들에게 쓉쓸려 자신을 잃는 지점에서부터 자신만의 생생한 기쁨도 멀어져가는지 모른다. 그 면면에는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마음 졸이고, 비난이 두려워 얼어 있고, 인정에 목말라 있는 모습이 있다. 매 순간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다. 제 모습대로 살아가는 방식은 타인이 알려줄 수 없다. 그리고 '나답게'살 때의 자유로움과 그 안에서 드러나는 잠재된 재능은 자신의 힘으로 꺼내어보기 전에는 자신조차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엇이지?' '나답게 사는 건 어떤 거지?'라고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질문은 언뜻 보면 상당히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같다. 하지만 대중적인 심리서에서도 이런 문제를 고민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이론은 이 부분에 상당히 무게를 두고 있다. 개인(Individual)이라는 단어는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divide'앞에 부정(not)을 의미하는 접두어 'In'을 붙인 것이다. 즉 , '나눌 수 없는', 더 이상 분리될 수 없는 한 개체로서의 존재를 의미한다. 타인과 구분되는 대체 불가한 존재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아들러는 나와 타인의 경계를 명확히 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과제의 분리'라고 표현했는데, 요점은 나와 타인의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고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물론 타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대신 선택하거나 강요하는 지나친 개입도 지적한다.


 영아기에는 자아감이 발달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나와 타인을 구분하지 못하고 엄마와 나를 한 몸처럼 여긴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시기이기도 하다. 점차 자기인식이 발달하면서 타인과 구분되는 나로서의 자신을 명확히 인지하게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를 타인과 구분하지 못하고 경계가 모호한 상태라면, '자신으로서'살 수 없다. 타인의 기대를 충족하느라 자신의 욕구를 살피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 또한 민감하게 인지하지 못한다. 진정한 '개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을 위해 산다거나, 타인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어 온전한 자아를 찾고, 내가 어떤 강점을 갖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물론 남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늘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쓰고 미움받지 않고 사랑해주길 바라기만 하며 사는 것은 불행한 삶이다. 애써 노력한 결과,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모든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늘 좋은 사람을 연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기시미 이치로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중에서-


타인을 위한 가면에 익숙해지기보다,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내보일 수 있는 용기를 택하는 것 은 어떨까. 누군가에게는 미움을 받더라도 자신에게 더 정직한 자신이 되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눈에도 매력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내 의견과 기호에 오롯이 맞춰주겠다는 사람보다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이 편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사랑받는게 목적이 아니다


이렇듯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가는 그런 사람을 일상에서도 만나곤 한다. 알고 있는 단어만으로는 그(녀)를 다 설명하기가 어렵고, 감히 그래서도 안될 것 같은 그만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나와 다르지만 그래서 더 이해하고 싶어진다.  그렇기에 드러나는 편안한 자유로움이 탐난다. 시간을 두고 대할 수 록 깊이가 느껴지기도 한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신을 변명하는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 남을 좇는 데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으며, 열등감으로 자신을 가두지 않기 때문이다. 나와 취향이 다르지만 나 또한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그들과 대화할 수 있는 것은 내게 큰 기쁨이 된다.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며, 그것은 타인의 사랑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채워가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 자신만의 빛을 내는 숲을 상상하게 된다. 모두가 제 모습대로 피어나 자신의 진짜 본성과 삶이 조화를 이루게 되는 풍경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렇게 드러나는 모습에는 선악과 미추가 없으며, 존재들의 다채로운 향기가 퍼질 것 같다. 그곳에서는 타인의 기대를 채우거나 타인의 고집을 꺾는 일보다 어떻게 더 현명하게 내 목소리를 내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면 좋을까 하는 고민이 중요해진다. 모두가 틀림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모두가 자신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나에게 질문해본다. '온전한 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이지?'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이지?'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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