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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령 Aug 11. 2018

슬픔을 나무라지 말라

실컷 울고 그만큼의 힘으로 기쁨을 향해가길


슬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본적이 있는가. 타인의 슬픔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어쩐지 차가운 피가 흐를 것만 같은 그런 사람말이다. 루마니아는 한때 이렇게 슬픔이 없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길러내 충격을 안겨주었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인구수를 늘려 국력을 높일 작정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했다. 돌볼 여력이 없던 부모들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고아원들은 순식간에 몇백명의 아이를 보호하게 되었다. 보모 한명이 수십명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정서적인 돌봄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유도 겨우 먹일 정도여서 심지어 젖병을 기둥에 매달아 먹였다고 한다.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일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도 반응을 해줄 수 없었다. 


슬픔이 갈 곳을 잃으면

 그 결과 아이들이 세 살정도 되었을 때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게 되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채로 한 두가지의 반복된 행동만 보였다. 그렇게 자라난 이들 중 일부는 독재자 차우셰스쿠 정부의 친위대나 비밀경찰이 되었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못해 극도의 잔인함을 장착한 사이코패스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루마니아 고아원에는 아이들이 급격히 늘어나 적절한 돌봄을 줄 수 없었다 . 출처<johnfeffer>

 이처럼 슬픔이 없는 사람은 정서가 아예 말라있는 경우가 많아서 무섭기까지 하다.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슬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는 어쩐지 정을 붙이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매정한 사람, 슬픔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을 가리켜 흔히 ‘피도 눈물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자신에게 슬픔이 없는 사람은 타인이 가진 슬픔의 영역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마니아의 고아원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 사회 역시 슬픔에 관대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 든가 ‘계집애처럼 질질짜고 그래’ 같은 말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슬픔을 부정적인 정서로 간주하는 것은 충분히 슬퍼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슬픔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슬픔은 갈 곳을 잃고 결국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슬픔을 잃어버린다.


우리 문화는 슬픔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빨리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라고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슬픔을 수용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일자샌드 [서툰 감정] 중에서 - 


 덴마크의 심리치료사 일자샌드의 설명처럼, 슬픔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으면 내면이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슬픔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게 되고, 삶을 반추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앞만보고 달리느라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때 내면은 여물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다면 성숙할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성장할 기회를 놓치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슬픔을 모르는 사람은 기쁨 또한 모른다는 점이다.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먼저 울음을 토해낸다


감정이 메말라 버리는 이유

이를 쉽게 이해하도록 구성된 영화가 있다. 픽사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어른들에게 더 인기가 있었다. 무엇보다 심리학적으로 접근하고 해석할 수 있는 측면들이 있어 심리학 분야에서 종종 인용하는 영화다. 


주인공 라일리는 아이스하키를 좋아하는 열한살의 평범한 소녀다. 눈여겨 볼 점은 라일리의 감정상태를 의인화해서 표현한다는 것이다. 라일리의 머릿속에는 '버럭이' '까칠이' '기쁨이' '슬픔이'라는 이름을 지닌, 살아있는 캐릭터들이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고 있다. 이로서 라일리가 경험하는 외부환경과 그 자극으로 인한 내면의 반응을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보여준다.  이 감정친구들은 '감정컨트롤타워'에서 컨트롤러를 다루며 라일리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예를 들어 라일리가 속한 팀이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우승을 하면, 머릿속 감정타워에서는 기쁨이가 컨트롤러를 주도적으로 잡는다.


 라일리 가족이 삭막한 도심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갈등이 생겨난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하는 데다가,  회사일로 바빠서 소홀해진 아빠 때문에 라일리는 점점 침울해진다. 그러자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슬픔이가 컨트롤러를 잡으려 한다. 그런데 이를 적신호로 인식한 기쁨이가 슬픔이를 제지하기 시작한다. 바닥에 작은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는 등, 슬픔이가 라일리의 감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슬픔이는 실수로 라일리의 핵심기억을 건드리게 되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엉겁결에 기쁨이와 같이 감정 컨트롤타워 본부를 이탈한다.

 

슬픔이를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기쁨이 / 출처. 영화 <인사이드 아웃>

 슬픔이와 기쁨이가 없어진 뒤, 라일리는 완전히 무감각해진다. 부모의 관심에도 전혀 반응하지 않고, 얼굴에 어떤 표정도 드러내지 않는다. 의욕이 없어 새로운 경험을 모두 거부하면서, 즐거울 수 있는 기회까지 완전히 차단해버린다. 즉, 슬픔을 피하려다 기쁨까지 잃어버린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머릿속에서 기억의 섬들이 하나씩 무너져, 과거의 즐거운 경험이 무의식 속으로 삭제되어간다. 어떤 즐거운 기억도 떠올리지 못하는 라일리는 자신이 처한 환경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라 극단적으로 판단하고 결국 가출을 시도한다.


 라일리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그에 따른 겉모습은, 우리가 슬픔을 적신호로만 판단했을 때 마음속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을 잘 보여준다. 이처럼 일상에서 슬픔과 함께 기쁨의 기억들까지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어떨까. 그것은 어떤 감정도 없는 메마른 상태가 아닐까. 우리가 정말로 경계해야할 것은 슬픔이 아니라 라일리처럼 무감각해져버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건강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에서 다양한 감정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다. 감정은 경험을 통해 형성되고, 그 감정은 또다시 새로운 경험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기억은 계속해서 감정들과 연합하여 재구성 된다. 그 안에서 슬픔의 역할은 즐거운 감정만큼이나 의미 있다.


 이 세계에서 슬픔의 정서를 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문학과 예술에서 슬픔이라는 정서를 제외한면 단조롭다 못해 아무 맛도 향기도 나지 않을 것이다. 매일같이 보는 텔레비전 속 드라마나 영화에서 슬픔을 끌어내는 스토리가 전혀 없다면, 모든 예능 프로그램이 없어지는 것만큼이나 지루해질지도 모른다. 음악은 또 어떤가. 감성을 건드리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슬픈 노래들이 사라진다면, 우리는 이별의 아픔을 무엇으로 위로받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슬픔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슬픔은 특히 상실과 상처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는 경험은 필연적으로 슬픔을 가져오는데, 이 때 애도작업에 실패하면 우울감, 즉 멜랑콜리가 된다고 한다. 오래전에는 비록 멜랑콜리를 병으로 여겼지만, 멜랑콜리가 적절히 조화된 문화와 사회는 풍성함을 지니고, 예술과 문학에서도 대중들과 깊이 교감할 수 있다. 슬픔과 멜랑콜리는 사람에게서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영국작가 알랭 드 보통은 한국인이 지닌 멜랑콜리를 높이 평가했다.



한국인은 멋진 멜랑콜리를 가지고 있다.
(중략)
미국인은 행복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은 그렇지 않다. 그게 좋은 시작이다. 한국인은 슬퍼할 줄 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그게 더 큰 만족으로 나아가는 첫 단계다.

   -2017년 5월 15일, JTBC <비정상회담> 중에서-


앞서 언급한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리 또한, 여러 감정이 다시 균형을 잡으면서 위기도 해결되어간다. 슬픔이에게 기쁨이만큼의 자리를 내어주자, 라일리는 이전의 행복했던 기억들을 떠올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라일리가 부모의 품에 안겨 펑펑 우는 모습은 슬픔을 꺼내 가족과 공유하는 장면이다.  



자신 안에 있는 슬픔을 꺼내어 보듬어 줄 수 있기를.

 슬픔은 불행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부정하면 불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 충분히 울고 또 충분히 웃어야 한다. 몸에서 생성되는 행복호르몬 중 하나인 엔도르핀은 웃을 때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실컷 울 때에도 분비된다. 신나게 웃는 것만큼이나 펑펑 우는 것도 몸에 긍정적인 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참 울고 났을 때, 몸과 마음이 후련해지고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의 슬픔을 당신의 것으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지독한 우울증으로 변해가기 전에 원 안에 갇혀있는 슬픔이를 꺼내주기 바란다.  


베개를 적시도록 실컷 울고 다시 그만큼의 힘으로 기쁨을 향해가자. 마음껏 슬퍼한 후에야 다시 기쁜 일을 그만큼의 크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내 기분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에도 감정컨트롤타워가 내 안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 마음의 주권이 항상 나에게 있다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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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조금 시들해질즈음 제 책이 독자분들의 손에 닿게 되겠지요. 그런 기쁜 상상으로 남은 여름을 기꺼이 버텨보려 합니다. 여러분의 남은 여름도 부디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오늘도 제 매거진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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