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해지고 싶은 엄마의 감정 다루는 법
'버럭'이라는 단어는 이상하리만큼 '엄마'라는 단어와 잘 붙는다. '따뜻하고 다정한' 엄마보다 '버럭 하는', '욱하는'엄마가 더 익숙하다는 건 슬픈 일이지만, 내게는 그랬다. 내 어린 시절의 엄마는 예기치 않은 순간에 화를 폭발하듯 내곤 하셨다. 지금이야 엄마도 열심히 버텨내던 중이셨을 거야 하고 짐작하지만, 그때는 어렸으니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 쉽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각인되어 있다. 크는 동안 '엄마가 되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내심 다짐하기도 했다.
아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될 때면, 죄책감과 더불어 그런 자신을 보는 게 너무 힘들다는 내담자 정희 씨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그 얼굴 위에 내 엄마의 얼굴이 한번, 그리고 내 얼굴이 또 한 번 겹쳐 보였다. 그렇다. 나 또한 아이에게 버럭 하는 보통의 엄마다. 아이가 두세 살 무렵, 통제되지 않는 짜증이 훅하고 올라와 그걸 그대로 발산해버리곤 했다. 그런 날은 죄책감과 나 자신에 대한 수치심에 못 견뎌하며 잠을 못 이루었다. 당시에 나도 그 문제로 (나는 그것을 매우! 심각한 문제로 인지했다.) 상당히 고민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적용해 보았는데 그게 잘 통했던 건지, 아니면 아이가 크면서 좀 수월해진 건지 다행히 지금은 버럭 하는 일은 없다. (화가 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시 돌아와서, 정희 씨는 늘 결심하고 얼마 안 가 또다시 좌절하는 악순환을 겪고 있었다. "잠든 아이 얼굴을 보면서 다시는 그렇게 동물처럼 화내고 싶지 않다고,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다짐해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으르렁대는 나를 발견하죠. 무한반복이에요" 아이보다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그 사실에 좌절한 듯 보였다. 나는 마음 같아선 손을 꼭 잡으며 너무나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출근준비도 정신없는 일인데, 아이를 깨워서 씻겨서 먹여서 등원준비를 시키며 날카로워지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내 몸 하나 일으켜 준비하는 것도 고단한 일인데, 다른 이의 몫까지 챙기는 일이 보통일이냐는 말이다. 아이도 아이대로 쉽지 않을 테니 엄마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테고, 마음이 급한 엄마의 인내심이 그리 넉넉할 리도 없다. 그러니 그 둘 사이의 충돌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정희 씨의 가장 큰 괴로움은 '내 모습이 어릴 때 가장 싫어했던 아빠의 모습과 똑같다'는 지점에 있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아버지는 흡사 군대의 상관처럼 두 자매를 대했다고 한다. 규율이 엄격했고 목소리는 늘 높았다. 호통이 떨어지면 정희 씨의 몸은 움츠러들었고, 눈을 마주치는 일조차 두려웠다고 했다. 그 시절의 기억을 말하는 정희 씨의 표정에는 아빠에 대한 미움과, 그때의 자신을 향한 연민이 섞여있었다. 자신은 따뜻하고 다정한 엄마가 되고 싶었단다. 하지만 어디 그게 말처럼 쉬운가. 말대답하는 아이에게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고 나면, 머릿속에 '네가 감히'라는 생각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건 바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졌던 태도였다. '너는 내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해. 너는 감히 나에게 대들 수 없어.' 그 믿음이 자신 안에도 깊이 심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를 닮아버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 그리고 여전히 따뜻한 엄마가 되고 싶은 마음이 한데 뒤엉켜 그녀의 마음은 늘 복잡하고 괴로웠던 것이다.
정희 씨의 고통은 단순히 버럭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 뒤에 따라오는 수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죄책감, 자기혐오, 통제되지 않는 자신에 대한 무력감, 그리고 닮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닮아버린 데서 오는 좌절감까지. 그 모든 감정들을 감당하느라 마음은 쉽게 소진되었다.
그런데 '아이에게 화가 난 것'과 '그 이후에 느끼는 여러 감정'은 서로 다른 층위의 일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처음에 훅 하고 올라온 '분노'가 1차 감정이라면, 그 이후에 죄책감이나 좌절감, 수치심 등은 2차 감정이다. 1차 감정은 사건에 대한 즉각적이고 본능적인 반응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통제하기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라앉는 감정이기도 하다.
반면 2차 감정은 '1차 감정에 대한 감정'이다. 즉, 사건이나 나의 반응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이 과거의 기억과 얽히며 만들어낸 생각의 감정이다. 이 감정은 현실보다 머릿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사건이 끝나도 사라지지 않고,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한 감정도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아님에도 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계속 이어지는 한 감정도 계속해서 되살아난다. 그래서 잠을 이루지 못하거나, 종일 그 감정에 매달려 일상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정희 씨의 경우 바쁜 아침에 아이에게 옷을 입으라고 재촉하는 상황에서 아이가 옷을 입기는커녕, 옷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을 부리거나 신경질을 낸다면, 순간 화가 올라올 수 있다. 이건 누구에게나 그럴 수 있는, 상황에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어떻게 표현하느냐는 또 다른 문제지만, 이런 분노 자체를 없애겠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을 이상적인 인간으로 여긴다. '분노라는 감정이 없는 상태'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그러면 분노를 느낀 자신을 더욱 미워하게 되고, 억눌러왔던 감정이 결국 더 크게 터져버린다. 분노는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감정이다. 모든 감정은 나름의 기능이 있는데, 분노는 '너를 지켜' '네가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라는 메시지를 준다. 그 감정을 잘 읽어낼 수 있다면 나는 나를 잘 보호할 수 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말과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 분노를 없애려 애쓰기보다, 내 안의 분노를 이해하고 다루는 방법에 집중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밖으로 터지는 분노는 사실 두려움의 표현인 경우가 많다. 겁이 많은 강아지가 잘 짖는 것처럼 말이다. 강아지는 자신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짖는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경계가 침범당했다고 느낄 때, 놀랐을 때, 혹은 마음이 다칠까 봐 겁이 날 때, 화가 올라온다. 그러니 '화'라는 감정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자신을 이해해 보는 것도 화를 지혜롭게 다루는 한 방법일 것이다.
화를 다스리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든다. 그리고 감정을 어떻게 발산하는가는 *습관의 영역이기도 하다. 버럭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원하는 것은 화를 쏟아내는 것이 아니다. 서로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지혜롭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일 것이다. 아이에게는 엄격하고 단호하게 잘못된 것을 알려주는 것일 수도 있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믿고 기다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짜증을 내거나, 거칠게 표현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면, 갑자기 오은영 박사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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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은 뇌가 에너지를 절약하기 위해 반복된 행동을 자동화한 결과다.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려면 의식적 노력이 여러 번 반복되어야 하며, 그 행동이 충분히 강화되면 더 이상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원하는 방향으로 행동하게 된다.
감정을 조절하는 것, 화를 거칠게 표현하는 습관을 바꾸고 참고 기다려주는 것. 이 모든 것은 결국 '자기 통제(self-control)'의 문제다. 자기 통제에는 의지력이 필요하다. 문제는 이 의지력이 무한하지 않다는 점이다. 심리학자 로이바우마이스터(Roy F. Baumeister)는 의지력이 유한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조절을 반복적으로 사용하면 마치 에너지가 떨어지듯 의지력이 소모된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 통제력이 자원처럼 줄어드는 현상을 '자아고갈(Ego-depletion)'이라 불렀다. 하루동안 이미 해야 할 일을 버텨내고,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피곤해진 상태라면 그만큼 감정 조절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나 역시 몸이 녹초가 된 날에는 확실히 아이의 감정을 받아줄 여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걸 느낀다.
그렇기에 화를 다루는 중요한 방법이 있다. 의지력이 소모되지 않도록 몸을 돌보는 것이다. 체력은 곧 마음의 기반이다. 몸이 지치면 마음은 쉽게 흔들리고, 몸이 안정되면 마음도 훨씬 단단해진다. 잘 먹고, 잘 자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결국 버럭을 예방하는 첫 단계다.
요즘의 나는 전보다 훨씬 열심히 운동한다. 아니, '체력 키우기'를 최우선에 두고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육아 동지인 지인과 함께 '다정해지기 위해 달린다'라는 슬로건을 앞세워, 규칙적으로 30분 이상 달리고 서로 인증하며 격려한다. 가장 다정해지고 싶은 존재인 아이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덜 괴롭기 위해서이다.
한 편, 정희 씨의 경우 10회기의 상담 동안 자신의 분노에 대해 더 깊이 탐색하고, 일과 육아에 지쳐있는 자신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아가 아버지와의 관계까지 함께 다루면서 감정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밀어내기에만 급급했던 화를 이제는 알아차리고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 결코 작지 않은 성과였다. 특히 '화가 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의 화를 이해하게 된 것만으로 괴로움은 크게 줄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니 당연히 육아를 하며 짜증이나 화가 올라오는 순간은 많다. 그럴 때면 감정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고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감정에 휩쓸려 자책하거나 스스로를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정희 씨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도, 이 글을 읽는 수많은 엄마들도 생각할 것이다. 화내지 않고 우아하게 아이를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하지만 누구도 예외 없이 우리는 이런저런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이다. 머릿속에 그리는 이상적인 '마냥 지혜롭고 따뜻한 엄마'는 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 감정에 걸려 스스로를 더 괴롭히는 일은 없기를. 그래서 나는 내 화를 미워하는 대신 마음을 살피고 챙긴다. 불필요한 생각에 걸려드는 대신 운동화를 신고 밖을 나선다. 내 아이와 또 나 자신을 위한 다정함이 바닥나지 않기를 바라며. 나를 이해하고 부지런히 뛸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