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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an 06. 2024

차가운 각성, 그리고 사랑의 온기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를 읽고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p.45)


   책을 읽는데 자꾸만 한기가 든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지만, 눈송이가 흩날리는 한겨울의 창밖 풍경과 소설 속 장면이 묘하게 겹쳐지며 시공간을 뛰어넘는 몰입의 경험을 했기에 그런 듯하다. 소설에서도 눈이 끈질기게 내린다. 가벼운 눈송이들이 성글게 내리는 꿈속의 장면으로 시작한 소설은 마지막에 이르면 나뭇가지가 부러질 정도의 무게와 사람이 파묻힐 정도의 두께로 쌓인 눈의 풍경을 그린다. 그 무게와 두께만큼 독자의 마음도 무겁게 가라앉는다. 소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은 이 이야기가 들려주는 서늘하고 묵직한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가? ‘공포’와 ‘전율’, ‘돌연한 고통’을 넘어 ‘차가운 각성’(p.12)에 이를 각오가 되었는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는 ‘5월 광주’를 다룬 작가의 전작 <소년이 온다>에 이어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로 2023년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한 수작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책을 집어 들기까지 시간이 걸린 것은 소설이 폭로할 비극과 폭력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행과 사회의 불합리함을 알고도 분노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용기를 준 것은 ‘이것이 지극한 사랑에 대한 소설이기를 빈다’(p.329)는 작가의 말이었다.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에 숨이 막히고 눈물이 차오를 때, 소설은 이 모든 고통이 ‘사랑’으로부터 왔음을 밝힌다. 인선은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제주도의 비극적 역사를 파헤치고 어머니의 옛 발걸음을 되짚어갔다. 인선의 어머니는 중산간 마을이 불에 탄 그날 이후 긴 세월을 실종된 오빠를 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추적했다. 경하는 친구 인선의 부탁(자신이 퇴원할 때까지 앵무새 ‘아마’를 돌봐 달라는)인 작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눈발을 헤치고 제주도에 도착해 이 모든 진실을 대면한다. 


   그러니까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침묵과 단념을 강요할 때, 그들은 사랑하는 이의 뼛조각 하나라도 찾기 위한 투쟁을 이어온 것이며 누군가는 자신의 생을 바쳐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싸워 온 것이다.  꿈과 생시가 구분되지 않고 혼과 혼이 이어지는 비현실적인 이야기 끝에 켜지는 작은 불꽃은 아직은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의지이며, 새의 날갯짓처럼 여리지만 분명한 생명의 온기다.     


괜찮아. 나한테 불이 있어. (...) 부러진 데를 더듬어 쥐고 다시 긋자 불꽃이 솟았다. 심장처럼. 고동치는 꽃봉오리처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가 날개를 퍼덕인 것처럼. (p.324-325)     


   작가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얼마나 거친 고민과 고통을 겪고 이 이야기를 완성했을까? 소설에서 기록하는 일에 종사하는 경하(소설가)와 인선(다큐멘터리 감독)에게서 한강 작가의 모습이 비친다. 경하는 사 년 전 어느 도시의 학살에 관한 책을 내고부터 악몽에 시달리다 개인의 삶과 삶을 지탱할 힘까지 모두 잃었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 뻔뻔스럽게 –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p.23)라는 경하의 자책은 작가의 고뇌를 반영하고 있는 것만 같다. 학살의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그들을 힘을 다해 마주보고 있던 ‘인선의 솔직하고 선선한 얼굴’(p.97)도 한강 작가의 그것 같다. ‘제대로 볼수록 고통스러운’(p.32) 비극을 똑바로 보고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유서를 쓰듯 써 내려갔을 작가의 사투에 박수를 보낸다. 


한강,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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