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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Feb 19. 2024

역사의 폭력 앞에서도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일

정찬의 <길, 저쪽>(창비, 2015)을 읽고

 

   ‘역사는 진보하는가?’ 한때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렇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답하기가 힘들다. 독재와 부패, 혐오와 배척은 이 사회에도 여전하고 어쩐지 더욱 기만적인 형태로 진화한 것 같다. 하지만 70~80년대 유신 체제와 군사정권에 대항해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이들은 분명 역사의 진보를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처럼 수많은 청춘이 희생의 대열에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현실 너머’의 세상을 꿈꿨다.     




   정찬의 장편소설 <길, 저쪽>(창비, 2015)은 바로 그런 이들의 이야기다. “우리는 역사의 발전을 믿었다. 비록 지금은 ‘길, 이쪽’에 있지만 언젠가는 ‘길, 저쪽’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p.194) 이러한 믿음으로 소설 속 인물들은 권력의 야만성과 폭력이 개인의 실존을 무참히 침해하는 와중에도 고결한 정신으로 맞선다. 그러나 시대의 질곡 속에서 개인의 삶은 산산이 부서지고, 죽은 자와 남겨진 자, 죽음과 맞먹는 상처를 간직한 자와 죽음 너머의 삶을 살아야 했던 자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변혁운동가 김준일은 5월광주의 기억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투쟁하지만, 결국은 현실 사회주의의 무너짐을 목격하고 신념을 품은 채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를 따라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던 윤성민은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겪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겠다는 꿈과 시인으로 살아가겠다는 꿈, 둘 다를 잃는다. 강희우는 윤성민의 여자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붙잡혀 성고문을 당하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녀는 자기 자신과 윤성민을 모두 버리고 프랑스로 떠났다. 김준일을 사랑한 차혜림도 슬픔 속에서 홀로 아빠 없는 아이를 키워야 했다.     


   시대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물들을 그리면서도 작가는 이 작품이 ‘사랑에 관한 소설’(p.267)이라고 말한다. 다만 우리의 삶과 역사가 뒤섞일 수밖에 없듯이 사랑의 이야기 속으로 한국 사회의 어두운 역사가 밤의 강물처럼 흘러들어간 것이라고 말이다. 이 때문에 성민과 희우 사이를 흐르던 강은 대지가 품을 수 있는 용량을 초과해 범람했고 익사하지 않기 위해서 희우는 떠나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십칠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죽음이 임박한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성민을 다시 만날 용기를 낸다.      


   희우는 편지를 통해 자신을 죽음으로 몰았던 고통을, 삶으로 이끌었던 생명(딸 영서)의 기운을 성민에게 고백한다. 성민은 사막에서의 임사 체험 후에야 죄책감을 극복하고 희우의 사랑에 응답할 수 있었다. ‘죽음 너머’에서 두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시작한다.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에요. 슬픔은 고통과, 고통이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해요.”(p.261) 성민과 희우는, 준일과 혜림은 역사가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슬픔의 힘으로 분노를 껴안고 고결함을 회복한 인물들이기도 하다.     


   정찬 작가의 이번 소설은 권력의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향한 깊은 애도로 읽힌다. 삶을 희생하면서까지 너머의 세상을 꿈꾼 그들을 작가는 ‘순결한 사람’(p.10)으로 그리고 싶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나는 의문이 든다. 소설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유신 시대의 저항 시인으로 불리며 시대의 등불이었던 김지하 시인도 말년엔 자기부정 내지는 모순에 빠지지 않았던가. 과연 현실에 이처럼 순결한 사람, 끝까지 고결한 도덕성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할까? 자신의 삶과 사랑이 송두리째 파괴되었을 때 슬픔으로 원한을 정화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있을까? 이쪽의 현실과 저쪽의 이상 사이에는 까마득한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역사의 진보라는 주제로 생각을 돌려본다. 작가는 ‘전환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역사는 새로운 시간을 맞기도 하고, 퇴보의 수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p.71)고 썼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나뭇가지에 마지막 남은 씨과실, 석과(碩果)(p.11)마저 먹어치우려 들고 있다. 생명이 자라고 사회가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의 싹을 없애고 있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역사적 비극을 애도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길, 저쪽’을, 도약할 수 있는 이상을 제시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현실의 모든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너머의 세상을 꿈꾸는 일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투쟁이라고 말이다.


정찬 <길, 저쪽>(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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