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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10. 2024

소설은 낙관을 품고
미래의 조각을 구성하는 일

정영수 <미래의 조각>(2024 현대문학 수상소설집 수상작)을 읽고

    그중 제일의 낙관주의자는 바로 나의 어머니였다.(p.11)
 

  정영수의 단편 <미래의 조각>은 화자인 주인공의 시점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지칭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낙관성을 지닌 사람이 왜 농약을 먹었을까?’(p.24)로 이어지며 어머니의 자살 기도와 이후의 일들을 서술하고 있다. ‘낙관주의자도 자살을 할 수 있을까?’가 아마도 소설이 의도한 일차적인 논쟁거리인 듯하지만, 나는 보다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과연 주인공의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를 ‘낙관주의자’라고 한다면, 우리가 그에게 기대하는 삶의 자세는 무엇일까? 



    

   우선 주인공이 자신의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설명한 대목을 읽어보자. 

   ‘어머니가 그리는 미래에서 세상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었다. 미래를 바라보는 그러한 낙관성은 어머니의 가장 주요한 특징이기도 했다. (중략) 그러니까 어머니는 언제나 현재의 좋은 것을 손에 잡기보다 미래에 도달할 좋은 것을 기다리는 일을 택하는 사람이었다.’(p.24)


   화자는 미래를 향한 낙관적인 전망을 기준으로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명명했다. 소설에 따르면 이는 ‘낙천주의자’와는 다르다. 낙천적인 사람은 ‘모두 괜찮다’라며 현실을 긍정하는 방식으로 재조합하거나 합리화한다면, 낙관적인 사람은 ‘모두 괜찮을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미래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주인공은 어머니가 ‘나는 나의 지난 삶에 죄를 지었다’(p.19)라는 유서를 남길 정도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부정적으로 여기기에 낙천주의자는 아니지만, 미래에 관해서는 맹목적으로 긍정하는 낙관주의자라고 말하는 듯하다. 

     

   얼핏 화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보이지만, 어딘가 묘하게 궤변론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낙천’과 ‘낙관’, 비슷한 듯 다른 뉘앙스를 품은 두 단어의 차이가 과연 시제인 걸까? ‘낙천’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더 가깝고, ‘낙관’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과 같이 보다 폭넓은 의미는 아닐까? 그렇다면 자신의 삶을 통째로 부정하는 주인공의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볼 수 있을까? 어쩌면 이것은 어머니의 자살(심지어 두 번째 자살 시도임에도)을 예견하지 못한 아들이 죄책감을 덜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낙관주의자라서 자살할 줄 몰랐다’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내가 그의 어머니를 ‘낙관주의자’라고 부르기에 망설이는 이유 중 또 하나는 그녀가 회복된 후에 적어 내려갔다는 글 때문이다. 그 글은 ‘자기 치유의 행위로서 지나온 삶을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일종의 회고록’(p.33)이 아니었다. 어머니는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가능했을 미래를 상상하며 조각난 글들을 썼다. 그 글 속에서 그녀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펼쳐졌고 시제조차 혼재되어 있어 마치 다중 우주를 구현한 것 같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십 대에 남편의 강압에 의해 임신하고 결혼한 현실과 달리, 글 속에서 그녀는 서울에 상경한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를 누비며 일을 하고 있다. 혹은 지금의 남편이 아닌 다정한 남자와 결혼해 두 아들이 아닌 두 딸을 두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식이다. 화자는 이를 두고 ‘어머니의 실패한 유크로니아’(p.35), 즉 실패한 시간적 개념의 유토피아라고 말하는데, 내가 보기엔 아무리 가능성의 미래를 구성한 것이라고 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이미 지나간 시간이라는 점에서 ‘낙관’이라기 보단 ‘현실 비관 혹은 회피’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길게 서술했지만 사실 이 소설에서 ‘어머니가 낙관주의자인가, 아닌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의 직업이 소설가라는 점에 집중하면 말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서술은 화자가 ‘원하는 방식대로 재구성’(p.35)한 글이다. 그가 어머니의 다중 우주 같은 글에 대해 ‘가능성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내가 쓰는(/쓰려는) 글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것이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점에서도.’(p.34)라고 말할 때, 그는 실제로는 소설가로서 소설 쓰기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낙관성을 견지하지 않고서는 이어나갈 수 없는 소설가라는 직업의 처연함을 말이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글이 ‘과거 속의 미래를 온전하게 재구성하는 데 끊임없이 실패하고 있었’(p.35)던 것과 다르게, 작가는 ‘또하나의 구성’(p.36)에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표면적으로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머니와 아들의 불안한 현실이라는 서사를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소설가와 소설 쓰기에 관한 이야기를 교묘히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미래의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소설을 향한 저자의 막연하지만 확고한 믿음이 가슴 떨리게 전달된다. ‘과거가 괜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처럼, 미래도 우리가 바라는 모습으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낙관이 가능한 이유는 미래는 언제까지고 미래에 머물러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 그 말이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한,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믿기로 한다.’(p.37)          


<<2024 현대문학 수상소설집>> 수상작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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