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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미 Jun 25. 2024

사소하지만은 않은 결단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 2023)을 읽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맡겨진 소녀>(다산책방, 2023) 이후 두 번째다. 비슷한 시기에 번역 출간된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읽으면서 작가가 추구하는 문학세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잔잔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나날에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 던져지는 순간에 주목한다. 처음엔 ‘사소한 것’처럼 보였던 조약돌의 파문은 점점 더 큰 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다가 마침내 커다란 울림과 여운을 남기며 끝난다. 처음 읽을 때보다 다시 읽을 때 그 궤적이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이 특징인데, 그럴 때마다 서사와 문장을 정교하게 구현해 내는 작가의 실력에 감탄하게 된다.     


   아마도 작가는 아이의 성장 과정에서 어른(꼭 부모가 아니더라도)이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중요한 환경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그리고 가끔은 어른의 사소한 관심과 선택이 한 아이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믿는 듯하다. <맡겨진 소녀>가 보호받는 대상인 소녀의 시선에서 이런 순간을 서술했다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어른의 관점에서 불운한 아이에게 손을 내밀기까지의 내적 고뇌와 용기를 그리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두 작품은 잘 포개어지는 한 쌍의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 2023)은 1985년 크리스마스를 앞둔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석탄, 목재상으로 일하며 아내와 다섯 딸을 부양하고 있는 펄롱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 시기 아일랜드는 여러모로 혹독하지만, 펄롱은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p.24) 착실하게 살아가는 인물이다. 안온한 나날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흔을 바라보는 펄롱은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도 쉽게 일어난다는 걸’(p.22) 되새기며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펄롱의 일상을 흔들던 불안은 어느 날 불쑥 그 실체를 드러낸다. 이른 아침 수녀원에 석탄 배달을 갔던 펄롱은 수녀원이 운영하는 세탁소와 그들이 보호한다는 어린 소녀들의 진상을 목격한다. 수녀원은 타락한 여성들을 교화한다며 소녀들에게서 아이를 빼앗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학대를 일삼고 있었다. 수녀원과 종교 집단이 마을 공동체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아내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펄롱에게 "사람이 살아가려면 모른척해야 하는 일도 있는 거야."(p.56), "교단은 다르지만 다 한통속이야."(p.107)라고 조언한다. 펄롱도 ‘여기 오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는 생각’(p.69)을 하며 고뇌하지만, 그럼에도 위선자가 될 수는 없다며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린다.     


   나랑 같이 집으로 가자, 세라.(p.116) 

   

   펄롱은 자신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온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p.120)라고 그는 생각했다. 사실 펄롱은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그의 어머니의 삶을 구원해 준 이는 미시즈 윌슨이다. 펄롱은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p.120) 떠올리며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 자신의 인생을 이루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긴 세월 묵묵히 곁을 지켜준 네드가 ‘나날의 은총’(p.111)이었음도 느낀다. 펄롱은 세라의 ‘미시즈 윌슨 혹은 네드’가 되어 자신이 받았던 일상의 사소한 것들을 돌려주겠다 다짐한 듯하다.  

    

   펄롱은 세라를 구하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고 있다 생각했겠지만, 어쩌면 펄롱이 구한 것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다섯 딸 중 누군가에게 닥쳤을 미래였을 수도 있다. 지금의 평온함이 계속될 거라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펄롱이 느꼈던 불안의 정체는 아마도 그가 현재 나와 가족이 누리는 안락함을 넘어 공동체의 영구적인 안전과 평화를 지향했기 때문일 것이다.  

    

   펄롱은 수도원으로부터 세라를 구한 일로 인해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동시에 ‘순진한 마음’(p.121)으로 행복을 느낀다. 무엇보다도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p.121)는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펄롱은 ‘자기 고집대로 흘러 드넓은 바다로 자유롭게 가’(p.117)는 배로강처럼 크리스마스 장식이 내걸린 시내를 가로질러 세라와 함께 집으로 향한다. 언젠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들었던 “이 길로 어디든 자네가 원하는 데로 갈 수 있다네.”(p.54)라는 말이 그에게 자신의 양심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결심, 세상에 맞설 용기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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