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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하는 마음으로

<철도원 삼대>부터 <체공녀 연대기: 1931~2011>까지 읽고

by 이연미 Mar 0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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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에서 마트를 오가는 길에 아파트 건설 현장이 있다. 신도시의 흔한 풍경이다. 오늘도 타워크레인 여러 대가 긴 팔(정확한 용어는 ‘지브’이다)을 좌우로 분주히 움직인다. 생각보다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서 보고만 있어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저런 높은 곳에서 사람이 지낼 수 있나?’ 언제부턴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크레인 위를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 <철도원 삼대>(창비, 2020)를 읽은 후부터인 듯하다.




   <철도원 삼대>는 철도 노동자 이백만의 4대손이자 공장 노동자인 이진오의 고공농성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진오는 사십오 미터 굴뚝 위, 둘레가 이십 보쯤 되는 공간에서 복직과 고용 승계를 주장하며 투쟁하는 중이다. 책에는 고공에 머물며 생존하는 방법(식사는 어떻게 제공되고 배설은 어떻게 처리하며 건강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등등)이 자세히 묘사되는데, 뉴스에서 접했던 ‘고공농성’이라는 차가운 네 글자 뒤에 이처럼 고되고 외로운 투쟁의 하루하루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세상은 조금씩 더디게 나아진다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400여 일 만에 굴뚝에서 내려온 이진오 대신 다른 노동자가 “이번엔 내가 올라가겠어.”라고 말할 땐, 누가 저들을 저 높은 곳으로 떠미는가 싶어 암담했다. 하기는 소설이 이미 일제강점기 노동쟁의부터 현대 고공농성까지 4대에 걸친 이 씨 가족의 기나긴 노동운동을 그리고 있었고, 산업 노동자 투쟁의 역사는 이후로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니 예측 불가능한 결말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철도원 삼대>에서 이진오의 선배 노동자로 회상되는 영숙은 실존 인물 김진숙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녀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용접공으로 한진중공업에 입사하였으나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었다는 이유로 부당 해고를 당했고 이후 노동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그녀는 2011년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85호 크레인에서 무려 309일간 고공농성을 벌인 인물이기도 하다. 단 몇 시간도 버티기 힘들 것 같은 고공의 크레인에서 수백 일을 지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겨울의 살을 에는 추위는 어쩔 것이며, 한여름의 땡볕은 어떻게 피하는가. 폭우나 폭설, 태풍이라도 오면 또 얼마나 위태로울까.     

 

   김진숙은 노동운동가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동료들의 인터뷰를 엮어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2016)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고난 속에서도 노동자라는 자긍심과 희망을 품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빼곡하다. 같은 여성 노동자이기에 감정의 동요가 예상되었지만, 그럼에도 ‘알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끝까지 읽어 냈다(이 책은 어쩐지 읽은 게 아니라 '견뎌내다, 살아내다'처럼 '읽어 냈다'라고 해야 할 것만 같다). <체공녀 연대기: 1931~2011>(후마니타스, 2024)를 쓴 남화숙은 김진숙의 고공농성이 일제강점기 을밀대 지붕 위에서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체공녀 강주룡에 대한 역사적 기억의 장을 되살려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출처: KBS 자료화면)부산 영도 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출처: KBS 자료화면)


   평양 을밀대의 체공녀 강주룡은 또 어떤가. 그녀의 서사가 궁금하다면 위에 언급한 <체공녀 연대기: 1931~2011> 외에도 박서련 작가의 소설 <체공녀 강주룡>(한겨레출판, 2018)을 읽어보아도 좋겠다. 역사 교과서에서 요약된 한 줄로만 배웠던 인물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다가온다. 책의 마지막엔 실제 신문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는데, 한자와 한글이 혼용된 기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 그 웅대한 포부에 눈물이 왈칵 터졌다. 기사를 참고하여 작가는 을밀대 지붕 위에서 그녀가 펼친 연설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내래 배워 아는 것 중 으뜸 되는 지식은, 대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처럼 명예로운 일이 없다는 거입네다. 하야서 내래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우에 올라왔습네다. 평원 고무 공장주가 이 앞에 와 임금 감하 선언을 취소하기 전에 내 발로 내려가는 일은 없습네다. 끝내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는다면 내 고저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노동 대중을 대표해 죽기를 명예로 여길 뿐입네다.'(<체공녀 강주룡>, p.241)     


평양 을밀대 지붕에 앉아 있는 강주룡 (사진 출처: ‘동광’ 1931년 7월호)평양 을밀대 지붕에 앉아 있는 강주룡 (사진 출처: ‘동광’ 1931년 7월호)


   1931년의 강주룡, 2011년의 김진숙의 체공녀 계보는 놀랍게도 2025년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구미 한국옵티칼 공장의 해고노동자 박정혜 씨, 소현숙 씨가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420여 일째 공장 옥상에서 농성 중이다. 여성 노동자 최장기 고공 농성자라고 한다. 그녀들을 지지하는 이들의 350km 도보 행진(구미에서 서울까지 희망 뚜벅이 행사)이 지난 2025년 3월 1일에 끝났다. <소금꽃나무>의 김진숙 노동운동가도 행진에 함께 했다고 한다. 암 투병 중임에도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참여했다는 인터뷰를 보았다. 그동안 무지하고 무심했다는 반성과 빚진 마음에 작은 기부금을 보탰다.     


   “낮은 곳에 피었다고 꽃이 아니기야 하겠습니까. (...) 민들레는 허리를 굽혀야 비로소 바라볼 수 있는 꽃입니다. 민들레에게 올라오라고 할 게 아니라 기꺼이 몸을 낮추는 게 연대입니다. 낮아져야 평평해지고 평평해져야 넓어집니다.”(<소금꽃나무>, p.163)     


   낮은 곳에 핀 민들레처럼 고공에 선 노동자도 보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혹독한 겨울을 보낸 그녀들이 이 봄엔 평평한 땅을 밟을 수 있기를, 그래서 널리 노동자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퍼뜨릴 수 있기를 연대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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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철도원 삼대>(황석영, 창비, 2020) / 오른쪽: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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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체공녀 연대기: 1931~2011>(남화숙, 후마니타스, 2024) / 오른쪽: <체공녀 강주룡>(박서련, 한겨레출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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