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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시 읽기] 이성부, '봄'

by 이연미



기다리지 않아도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 ‘봄’




[단상]

기온은 이미 따뜻해졌고 사람들의 외투도 가벼워졌지만, 마음은 여전히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느낌이다. 어수선한 시국에 아직 역사의 '봄'이 찾아오지 않았기 때문인 듯하다. 긴 기다림에 지쳐가지만 ‘더디게 더디게’ 그러나 ‘마침내 올 것이 온다’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지연될수록 사회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진영의 분열도, 혐오의 언어도 심화하고 있다. 더 이상의 지연은 참지 못하겠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피소추인 윤석열의 파면을 촉구하는 작가 한 줄 성명'에 작가 414명이 동의했다. 한강 작가의 한 줄을 옮겨본다.


'훼손되지 말아야 할 생명, 자유, 평화의 가치를 믿습니다. 파면은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일입니다.' _ 한강


이는 헌법재판소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이다. 봄을 돌려달라는 시민들의 '다급한 사연'에 이제는 대답할 차례이다. 봄이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다면 그간의 애태움은 다 잊고 정말로 두 팔 벌려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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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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