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탈리스트>(브래디 코베, 2024) 리뷰
본 리뷰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과 개인적인 관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브래디 코베, 2024)는 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아 미국으로 망명한 헝가리 출신 건축가 라즐로 토스(애드리언 브로디)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브루탈리스트’라는 제목에서 브루탈리즘이라는 건축 양식과 건축가에 관한 예술적인 영화를 기대하게 되지만, 실제로는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기회와 함정, 이민자의 꿈과 좌절, 인간사에 깃든 예술성과 야만성에 관한 지극히 현실적이고 적나라한 폭로 영화에 가깝다.
영화의 결말은 ‘서막’에 이미 암시되어 있었다. 자유를 찾아 미국행 배에 몸을 실은 라즐로가 뉴욕에 도착한 순간, 기뻐하는 라즐로 일행의 모습 뒤에 ‘자유의 여신상’이 거꾸로 맺힌 상으로 등장한다. 자유와 환대를 약속하는 듯했던 아메리칸드림은 이내 유대인, 흑인, 이민자, 가난한 자를 향한 멸시와 차별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드러낸다.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뉴스(풋티지 영상)는 초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있는 도시를 홍보하지만, 매춘이 성행하는 뒷골목과 구걸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관광지는 자유조차 삐딱하게 기울어진 자본주의 사회의 한계를 대변한다.
아직 유럽을 벗어나지 못한 라즐로의 아내 에르제벳(펠리시티 존스)은 자신과 조카 조피아의 생존을 알리는 편지에 괴테의 말을 인용한다.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사람보다 더 절망적인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은 없다.’ 사촌의 가구점에서 이용만 당하다 쫓겨난 라즐로는 우연한 계기로 부유한 사업가의 거대 프로젝트를 맡으며 건축가로서 재기를 꿈꾸지만, 기회는 덫이 되어 그를 자본주의의 노예로 옥죈다. 게다가 술과 마약으로 도피하던 그는 점차 약물의 노예가 되어간다.
일용직을 전전하던 라즐로에게 기회를 안겨준 사람은 사업가 해리슨 리 밴 뷰런(가이 피어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라즐로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바로 그 전쟁에서 부를 축적한 사람이다. 해리슨은 라즐로가 리모델링한 서재가 모던 건축의 사례로 명성을 얻자 뒤늦게 과거의 일을 사과하며 일을 의뢰한다. 해리슨이 라즐로의 천재성에 감복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왜 건축을 택했죠?”라는 물음에 라즐로는 이렇게 답한다. “정육면체를 설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걸 만드는 거죠.” 그리고 자신의 건축물은 참혹한 전쟁에도 살아남았으며 다뉴브 강변의 침식도 견디게 설계되었다고 덧붙인다. 필멸하는 존재인 인간은 예술의 영속성에 매료되기 마련이다.
어머니의 이름으로 지역 커뮤니티 센터를 짓고 싶다는 해리슨의 소망은 얼핏 공동체를 지원하고 건축 예술을 후원하는 일 같지만, 사실은 자신의 부와 사회적 지위, 예술적 안목을 자랑하고자 하는 허세에 불과하다. 자본가 해리슨의 횡포는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건축가 라즐로를 해고했다 재고용하는 등 변덕을 부린다. 그리고 라즐로가 성공에 취해, 술과 약에 취해 가장 취약한 모습을 보일 때 그 야만성을 드러낸다. “핍박받는다고 분노하면서 왜 핍박받을 짓을 하냐”는 그의 비난은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를 피해자 탓으로 돌리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나중에 에르제벳이 남편 대신 그의 죄를 따져 물었을 때, 해리슨은 자신은 친절을 베푼 죄밖에 없다며 라즐로를 주인의 손을 문 늙고 병든 개 취급을 한다. 그의 아들 해리는 분노하며 다리가 불편한 에르제벳을 밖으로 거칠게 끌어낸다. 사람의 재능을 필요에 따라 쓰고 버리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은 잃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자본과 자본가의 민낯을 보여준다. 발터 벤야민이 남겼다는 말이 떠오른다.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의 밑바닥에는 한 무더기의 야만이 깔려 있다."
라즐로의 조카 조피아는 전쟁의 충격으로 잃었던 말을 되찾자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선언한다. 그녀의 선택을 반대했던 라즐로와 에르제벳도 나중엔 “이 나라는 썩었다”며 이스라엘로 가서 정착한 것으로 짐작된다. 유대인의 예루살렘 이주가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이어진 유대인 냉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걸 감독은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다면 이 영화는 유대인의 피해자성을 강조하며 시오니즘을 지지하는 문제작인가?
에필로그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건축가 라즐로의 작품과 생애를 돌아보는 회고전이 열리는 1980년 제1회 베니스 건축비엔날레를 비춘다. 연설가로 나선 조피아는 삼촌이 자신에게 한 말이라며 이렇게 전한다. “남들이 아무리 삶을 유린해도 중요한 건 목적지이지 과정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조피아의 얼굴에 전쟁 당시 취조를 받던 그녀의 어린 얼굴이 겹쳐진다. 이 장면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걸까?
라즐로의 굴곡진 인생이 다다른 목적지는 예루살렘과 베니스가 된 셈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중요하다고 하기에는 영화는 215분 내내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여정을 보여줬다. 그리고 라즐로의 건축은 그의 인생사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다. 과정은 어떻든 간에 결과가 중요하다는 말은 그래서 미심쩍다. 어쩌면 영화는 자유와 노예, 예술과 야만, 목적지와 과정 등 대비되는 것들을 비롯해 우리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온갖 모순을 다시금 성찰해보게끔 연출된 건지도 모르겠다. 예루살렘이 갖는 해방과 갈등의 이중적 의미를 포함해서 말이다. 조피아의 얼굴에 겹쳐진 어린 조피아는 지금도 가자 지구에서 반복되는 전쟁의 트라우마를 상기시키기 위한 장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