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바다와 푸른 섬을 하나로 묶는 주문: USA
앤테벨럼 시대와 워키즘, 문화전쟁에 관한 글은 사실 붉은 바다와 푸른 섬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고자 쓴 글이었다. 참고한 538의 칼럼도 바이든 시대에 미국의 리버럴과 보수 진영 앞에 놓인 과제를 각각 따로 살펴본 연재 기사였다. (1년 전에 쓴 칼럼은 미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밝혔지만, 대체로 상황은 글에서 전망한 대로 흘러왔다. 물론 이미 흐름이 분명히 보이는 내용을 언급한 좀 뻔한 전망이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송펠레의 눈에는 대단해 보인다. 송펠레는... 접니다.)
민주당을 지지하는 소위 리버럴 진영은 좀 더 선명한, 진보적인 의제를 앞세워 바이든 행정부를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주다. 기사 제목도 "민주당과 미국의 이념 지형을 다시 그리는 데 쓰이는 새로운 의제들"이었다. 지난번에 썼듯이 구조적인 인종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인지하는, "늘 깨어있자"는 취지의 워크 사상(woke ideology)은 진보 진영에서 먼저 나온 말이다.
트럼프의 열혈 지지층을 중심으로 재편된 공화당은 급진적인 진보 진영의 아이디어를 공략하며 반사 이익을 얻는 전략을 취할 거라는 전망이 핵심이었다. "캔슬컬처와 깨어있는 사람을 공격하는 것이 공화당의 새로운 전략이 될 것인가"라는 글의 제목이 모든 걸 말해준다.
정치적 양극화를 이야기할 때면 흔히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를 밝히려는 헛된 책임 소재 논쟁이 벌어지곤 한다. '상식을 대변하는 우리 쪽은 가만히 있었는데, 몰상식한 저쪽이 극단적인 사상을 더 강화하고 나오는 바람에 우리와 차이가 드러났다'는 식의 주장을 양쪽에서 똑같이 한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비슷한데 주어와 목적어만 바뀐 주장이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달린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우리가 합의하기 어려운 난제다. 닭과 달걀 이전에 빅뱅이 있었다는 데까지 가지 않는 한. 아, 사실 이 세상은 빅뱅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신이 창조한 거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 문제도 합의가 쉽지 않겠다.
아무튼 원인을 밝히는 건 차차 하도록 하고, 정치적 양극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결과들을 먼저 살펴보자. 538에서 붉은 바다와 푸른 섬에 사는 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여러 여론조사 결과를 한데 모아 각 주장에 대한 찬반, 동의 여부를 정리했다.
대부분 항목에서 민주당원(DEMS)과 공화당원(REPS)의 생각은 확연히 다르다.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심각한 차별을 받고 있다? 민주당원은 79%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공화당원은 26%만 동의한다. 미국 사회는 흑인으로서 살기 훨씬 힘겨운 곳이다? 민주당원은 74%가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공화당원은 9%밖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부분 이런 식이다.
어? 그런데 서로 다른 우주에서 사는 것 같은 양측의 의견이 수줍은 듯 손을 맞잡고 있는 항목이 하나 눈에 띈다. 가운데쯤 있는 문항이다. "Agree that "every billionaire is a policy failure." 직역하면 "억만장자의 존재는 그 자체로 정책이 실패했다는 뜻이다" 정도가 된다. 좀 더 풀어보면 "사회적으로 생산하고 창출한 부가 몇몇 개인에게 집중되는 걸 막는 것도 정부의 역할인데, 지금 미국 정부는 그걸 잘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 주장은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했다. 심지어 정치적 성향이 뚜렷하지 않은 중도층, 무당파를 포함한 전체 응답자를 기준으로 보면 저 주장을 지지한 미국인은 11%에 불과하다. 거칠게 말하면 미국인 열에 아홉은 지금의 불평등을 구조적인 문제라고 여기지 않는다.
붉은 바다와 푸른 섬의 차이를 부각하는 시각에 반대하는 이들은 미국을 퍼플 아메리카(Purple America)로 묘사하곤 한다. 민주당, 공화당을 가리지 않고 고루 나타나는 보랏빛 미국의 특징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자본 권력과 정치권력에 철저히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는 점이다. 이건 시장 만능주의에 빠져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보장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믿는 이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대다수 미국인이 정부가 하려 하면 진저리를 치고 '미국답지 않다'며 거부할 일을 기업이 하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오히려 응원한다. 정부나 관료는 비효율, 무능, 부패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고, 반대로 혁신, 자율, 발전, 진보 같은 좋은 이미지는 기업이 독차지하고 있다.
이런 이중잣대가 또 한 번 분명히 나타난 사례가 이번 주 마무리된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 발표가 아닐까? 머스크는 분명 위인이다. 대단하다는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대단히 대단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트위터의 "잠재력을 끌어내겠다"는 머스크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다. 여기서 잠재력을 주가로 국한한다면 이견을 달기 어렵다. 트위터의 주가는 2013년 공개기업이 된 뒤 정처 없이 헤매는 방랑자 같은 행보를 계속했다. 머스크가 트위터의 상장을 폐지해 비상장기업을 만들고 나면 주가로 확인되지는 않겠지만,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내고 기업가치를 높이는 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능력과 비전과 배짱과 '똘끼'까지 다 갖춘 사람 아닌가. 사실 머스크에 관해 나도 색안경을 끼고 보던 것들이 꽤 많았다는 걸 얼마 전 테드(TED)와 인터뷰를 보고 깨달았다.
그러나 트위터가 소셜미디어로서 하고 있는 공론장으로서의 기능, 민주주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잠재력'을 평가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야 한다. 자기 회사 지분 좀 팔고 주식 담보 잡히고 사실상 자기 명성을 담보로 은행에서 뚝딱 빚을 내서 50조 원 넘는 돈을 며칠 만에 만들어낸 갑부가 언론의 자유를 수호하는 구세주를 자처하고 나선 상황은 기이하다. 정치권력이 공론장을 관리하겠다고 나서면 미국 사람들은 아마도 분연히 떨쳐 일어날 것이다. 당연히 정치권력은 공론장에 참여하고 소통하되, 공론장의 룰을 관장하는 관리자가 되어선 안 된다. 그런데 그건 자본 권력도 마찬가지 아닌가? 머스크가 콕 집어 말한 건 아니지만, 그는 실리콘밸리(푸른 섬)의 테크 리버럴들이 공론장의 경찰이 되면서 트위터에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역시 자세히 밝히진 않았지만, 머스크가 내놓은 대안은 공론장의 기능을 살리는 데 있어서는 별로 미덥지 않다.
머스크, 트위터와 관련해 수많은 기사와 분석, 칼럼, 소고가 쏟아졌다. 그 가운데 왜 머스크 같은 갑부가 공론장 역할을 하는 기업을 사들이는 게 민주주의에 해로울 수 있는지 위험을 지적한 작가 아난드 기리다라다스(Anand Giridharadas)의 칼럼은 월요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소개할 생각이다. 찾아보니 기리다라다스는 3년 전에 "엘리트 독식 사회"라는 책을 쓴 작가다.
칼럼에서 인상적이었던 두 구절만 소개하고 글을 마무리한다.
철학자 이사이야 베를린은 "늑대에게 무한한 자유란 양들에겐 끝없는 죽음의 공포"라고 일갈한 바 있다. 많은 미국인이 바로 이 점을 간과하곤 한다. 정부 또는 거대한 중앙집권 세력은 분명 자유에 커다란 위협이지만, 자유에 위협을 가하는 게 정부밖에 없는 건 아니다.
갑부들이 언론사나 소셜미디어를 돈으로 사버리는 건 결국 공론장의 논의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다. 이는 21세기판 강도남작(robber baron)의 매뉴얼이기도 하다. 시민들은 필요할 경우 목소리를 내고 주장을 개진할 플랫폼을 빼앗기는 셈이지만, 어째서인지 머스크의 트위터 인수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지식인이자 혁신가인 머스크가 공론장을 지켜줄 현인이 될 거라며 열광하는 이들이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