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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국 Sep 21. 2019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제주도 한라산 어리목

윗세오름 코스 산행

언제부터였을까. 맡고 있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면 습관적으로 짧은 국내 여행을 떠났다. 지리산으로, 속초로, 정동진으로, 제주도로. 나는 떠나야 다시 다음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운이 생겼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CF카피처럼 나는 여전히 떠날 날을 기다리며 열심히 일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낯선 공간으로 떠나는 순간은 쉼을 통해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에게 새로운 결심으로 “다시 열심히 일해 보자!”라고 선포하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새로운 결심과 달리 일이 모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상황 변화에 따라 조금 다르게 결정되었다는 것. 날씨의 영향을 받아 코스가 변경되는 여행 계획이 그러하듯 처음 상상했던 계획대로 흘러가는 인생은 거의 없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다시 진로를 수정하고 고치면서 더 나은 삶을 만드는 게 인생 아닐까.

올해 나는 우여곡절 끝에 독립출판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다음 프로젝트는 문화 기획자로 현장 복귀를 선택했다. 재취업이 플랜 A, 1인 출판사 창업이 플랜 B였던 프로젝트는 생각처럼 잘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다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면접을 보고 프로젝트 종료 시기에 맞춰 운 좋게 지인을 따라 제주 한라산 산행을 떠났다. 아침 일찍 도착한 제주에는비가 오락가락 내렸다. 렌터카를 빌리는 길에 만난 버스 기사 아저씨는 비 오는 날 여행하기 좋은 곳으로 실내 미술관과 박물관을 추천해주셨다.     

 

“제주에 가을장마가 15일 동안 지속된 건 역사이래 처음 있는 일이에요.”     


버스 기사 아저씨의 으름장에 조금 걱정이 앞섰지만, 일행과 함께 처음부터 계획한 한라산으로 향했다. 아저씨 말을 순응하는 게 좋았을까? 우리가 플랜 A로 생각했던 한라산 백록담 등산 코스는 역시나 입산 통제였다. 새로운 마음의 결심을 갖고 떠난 제주도 산행에서 조차도 나는 플랜 A로 생각했던 등산 코스를 갑작스럽게 플랜 B 코스로 바꾸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입산 통제의 아쉬움에 울상 짓고 선택한 플랜 B가 어리목에서 윗세오름으로 이어지는 코스였는데, 산행 초반에는 울상인 어린아이 달래듯 반겨주는 쾌청한 어리목을 만났다. 초록 숲 사이로 반겨주는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먹구름 뒤로 가려졌던 파란 하늘이 얼굴 빼꼼 내밀 때까지도 산을 오르는 여정에는 여유가 넘쳤다.      

어리목에서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도, 땀을 식혀주는 바람도 그저 시원하기만 했다. 예상외로 좋은 날씨에 나는 앞으로 닥칠 일들은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채 한라산에 흠뻑 취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도가 높아지자 한라산에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신발부터 온몸이 모두 물로 젖어 체온이 내려가는 게 조금씩 느껴졌고, 그 순간 문뜩 겁이나서 산행을 망설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비바람 몰아치는 거센 저항을 뚫고 끝까지 목적지를 향해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 이끌어 주던 일행 덕분이었다. 몸은 고되고 힘들지 라도 목표를 향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사실 플랜 B와 플랜 A의 경계는 별로 큰 차이가 없어진다.  

짧은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 모든 일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플랜 B와 플랜 A는 계속 바뀌었다. 1인 출판사 창업 도전을 결심하고 떠난 여행이었지만, 공교롭게도 나는 다시 회사에 들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뜻밖의 결과와 마주했다. 그로 인해 플랜 A로 기획했던 취재 계획은 지금의 플랜 B 글로 대체되었고, 지인이 플랜 A로 제안한 10주 글쓰기 수업은 플랜 B로 대체되어 하루 글쓰기 특강으로 바뀌었다.  

        

영화 <기생충>에서 ‘전원 백수’ 집의 가장 역할을 맡았던 배우 송강호는 우연히 친구의 제안으로 가짜 재학증명서를 만들어 부잣집 과외 선생으로 간 아들 최우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아들아, 역시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들의 계획과는 다르게 기택 가족의 가짜 인생은 처참히 무너진다. 현실을 반영한 영화의 전개 흐름에서 보듯이 세상의 일은 원래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정상인 걸까? 우리는 비정상이 정상인 듯 포장되어 있는 세상, 무엇이 가짜고 진짜인지 누구의 말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아리송한 현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주어진 상황에서 플랜 A와 플랜 B의 경계를 넘나들며 열심히 일하는 당신에게 나도 이렇게 외쳐본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Ir a las montañas! (산으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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