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씨알의 꿈

씨알은 풍성한 곡식이 되어 장마당 아이들의 밥이 되고 싶다.

"이 녀석들은 정말 알곡이야 내년 농사는 풍년이 될거야"  지난 해 늦가을, 가을겉이 낱알 중에서 모종볍씨인 나는 할아버지의 두런두런하는 말씀을 들으며 뒷 창고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내가 벼 껍질을 깨고 싹이 튄 것은 솜털처럼 부드러운 모판위에서 였다.엄마 뱃속의 양수같이 따스함을 느꼈다. 내가 신생아처럼 가느다란 눈을 뜨자 오월의 맑고 눈부신 햇살이 미소짓고 있었다. 따스한 황토물이 내 몸을 감싸면서 속삭였다.

"어서 자라렴  씨알아 내가 너를 키워줄께 자라서 세상에 나오거라 너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단다. " 

멀리 오월의 산은 흰구름 양산을 쓰고 초록색 브라우스를 걸치고 있었다. 싱그런 아카시아 향기가 온 들판에 진동했다. 나는 가슴을 활짝 열고 그윽한 꽃향내를 깊이 들이마시면서 푸르게 자라났다.오월말이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 뼘으로 자란 나를 산골짜기 꼬불꼬불한 계단논에 하나하나 옮겨 심었다." 어이구 허리야, 농사가 너무 힘들어, 올해가 마지막 이야 올 가을겉이가 끝나면 서울에 있는 아들녀석 집에 가서 살아야지" 할아버지는 한 뼘만큼 자란 나를 심고는 굽은 허리를 뒤로 제치며 하늘을 향해 혼잣말했다. 말랑말랑하고 질퍽한 땅과의 만남은 정말 유쾌했다. 처음 이었지만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친밀함이 느껴졌다. 나는 눈부신 태양과 흙과 물이 주는 영양분을 빨아들이며 무럭무럭 자라갔다. 유월이 바람결이 나를 이리저리 흔들면서 장난을 쳤다. 내 키가 팔뚝만큼 자라면서 할아버지는 물길을 내고 피를 뽑으시느라 바빠지셨다.유월말 장마철이 시작되자 하늘에 구멍이 난것처럼 며칠씩 폭우가 쏟아져내렸다.할아버지는 행여 며칠 밤을 한 숨도 못주무시고 우리들의 쓰러진 몸을 세워주셨다.칠팔월의 폭염속에 내 키는 세살박이 아이처럼 훌쩍 커 버렸다. 구월에 초속 20m가 넘는 강한태풍이 두 차례 지나갔지만 우리의 뿌리는 단단히 내려졌고 할아버지의 애정어린 보살핌으로 모두 안전했다. 우리의 길고 가다란 잎줄기에서 술래잡기하며 미끄럼도 타는 메뚜기를 잡으려고 뛰노는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하는 웃음소리가 높고 푸른 가을하늘로 올라갔다. 나의 줄기에는 제법많은 씨알들이 출렁거렸다. 아이들처럼 건강하고 튼실하게 여물어갔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었다. 할아버지와 동네사람들은 낫을 들고 나타나셨다. 우리는 이발사가 가위로 머리를 깍듯 싹뚝싹둑 잘려나갔다.친구들과 옆으로 나란히 누워 바라본 시월의 하늘은 유난히 높고 푸르렀다. 몇 달동안 때로는 땡볕아래에서 비바람에 맞서며 서있다가 모처럼 눕게되자 기분이 좋았다.우리는 몇 날인가 따스한 가을햇살아래 일광욕하며 달콤한 휴식을 누리다가 탈곡기가 있는 창고로 실려갔다.몇 달 전만해도 하나에 불과했던 한 톨의 씨알이 수 백개가 되어 튀어나오는 탈곡기는 커다란 뻥튀기 기계 같았다.가마니에 담기면서 아랫마을에서 온 알순이라는 볍씨를 만나게되었다. 피부가 곱고 보드라운 알순이는 보기좋을 만큼 포동포동했고 건강해 보였다.  알순이는 자기가 옛날부터 궁중에 진상하던 극상품 볍씨 가문이라고 말했다.나는 그 동안 겪었던 참새들의 공격과 태풍을 꿋꿋하게 이겨낸 무용담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보조개가 유난히 예쁜 알순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런 알순이가 마음에 쏙 들었다.나는 끝까지 헤어지지 말자고 약속했고 우리는 그 날부터 천생연분처럼 단짝이되었다. 알순이와의 연정은 그렇게 어둡고 벼로 짠 가마니속에서 애틋하게 피어났다.우리가 북한동포돕기를 위해 북한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남포로 가는 화물선 안에서 였다." 알돌아 나는 너무 행복해, 우리가 배고픈 북한어린이들의 밥이 된다니 정말 기뻐"알순이는 들떠서 말했다.알순이는 지난 오월 모내기하는 사람들에게 북한의 장마당에서 떨어진 음식을 주워먹는 꽃제비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있었다. 밤이 이슥하여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트럭에 실어 어디론가 달려갔다. < 평남 도정공장 >이라는 검은색 페인트 간판이 달빛에 어른거렸다.멀리 높은 빌딩의 조명이 비추는 것으로 미루어 평양시가지 부근임을 알 수 있었다.여기서 알순이와 나는 탈곡기에 휩쓸려 들어갔다.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7분도 쌀이 되어 미끈한 모습이 되었다.우리는 다시 가마니에 담겨져 근처의 커다란 창고로 옮겨졌다.

알순이는 도정과정에서 몸에 상채기가 났지만  불쌍한 어린아이들의 배고픔을달래줄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레임으로 잠까지 설쳤다.운동장만한 창고에는 쌀,콩,조,밀,수수등 각종 곡식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한 구석에는 이미 작년에 북한동포돕기 쌀보내기때 도착한 이웃동네 어르신들이 보였다.그들 대부분은 생기가 없었고 이미 거무튀튀하게되거나 몸이 썩어들어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씨알들도 있었다." 북한에는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왜 이 곡식들을 나누어 주지 않은걸까?" 알순이가 물었다." 글쎄 사람들이 관리를 잘못해서가 아닐까? " 나도 의아스러웠다.그런데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다.이 창고에 있는 곡식들은 평양에 사는 당 간부와 군인들에게만 공급될 뿐 헐벗은 북한주민에게는 한 톨도 전달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되자 알순이는 속이 상했다.그때부터 그녀는 생기를 잃고 시름시름 앓게 되었다.

곱고 매끄럽던 피부가 거칠어 지고 생채기난 부위가 서서히 곪아가기 시작했다.찬 바람이 칼날처럼 불던 어느겨울날, 알순이의 몸은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나에게 말했다." 알돌아 너무 추워 내 몸이 썩어들어가고 있어 알돌아 내가 죽더라도 너 만이라도 꼭 장마당의 꽃제비들에게 말해주렴.

내일은 반드시 새로운 태양이 떠오를거라고 하늘에 빛나는 진짜 태양을 보며 희망을 가지라고 아~ 알돌아 너를 만나서 정말 행복했어, 사랑해 "내가 사랑했던 알순이는 그렇게 내 품에서 까맣게 탄 채 숨을 거두었다.

나는 북녁땅의 깊고 추운 겨우내내 울고 또 울었다.남쪽으로 난 창고의 창살틈으로 봄의 햇살이 흘러 들어왔다. 제비 한 마리가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물고와 추녀밑에 집을 짓고 있었다. 멀리 아주 멀리에서 장마당을 기웃거리는 아이들의 피맺한 부르짖음이 바람결에 실려오고 있었다. 아 나에게 날개가 있다면....



작가의 이전글 시 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