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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y Dec 04. 2022

내가 그러하듯이



나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들이 그립다. 

여행길에서 스치듯 만나 함께 걸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느 학원 수업에서 자주 마주치던, 오래 전 연락이 끊기고 어떤 연결고리도 남지 않은 얼굴들 말이다. 

한동안 제주 올레길에 빠져 많이도 걸었다. 올레길을 걸으러 떠날 때는 늘 혼자였다. 어느 날은 내내 바닷가를 걸었고 어느 날은 으슥한 산길을 걸었다. 산길에서 묘지를 마주하거나 수풀 한 구석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는 무섭기도 했다. 그럼에도 걸을 때는 혼자가 편했다. 오히려 혼자였기에, 누군가와 함께라면 마주하지 않았을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도 많이 불어 스산한 날이었다. 그 날도 아침부터 나가 걷고 있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비슷한 속도로 걷던 분이 ‘바람이 세찬데 바람막이 없으세요?’ (바람막이는 올레길 여행자의 필수품이다)라며 말을 걸어왔다. 덕분에 가방에 넣어두고도 깜빡 잊고 있던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같이 걷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얘기하다가 홍천의 하이트 공장 연구원으로 근무한다기에 나도 신입생 때 거기 가봤다고, 술을 공짜로 계속 줘서 잔뜩 취했다고, 웃기는 일이 많았다며 떠들었다. 그러니 그 분도 대학생들 견학 오면 연구원들도 즐거워진다고 같이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고… 거기에 내가 있었다!  몇 년 전에 한 사진에 담긴 이들이 제주 서귀포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다. 인연에 놀라워하며 우리는 계속 걸었다. 전복 뚝배기나 한 그릇 먹을까 하고 들어간 식당에서 그는 회 정식을 사주었고, 올레길 코스 중간에 있던 정방폭포, 이중섭 미술관에서는 입장료를 내주었다. 우리가 이전에 만났던 사이었던걸 알게 된 게 먼저인지, 이런저런 호의를 베푼 것이  먼저인지는 희미하다. 그렇지만 어떻게 이렇게 받기만 하냐며 내 몫은 내가 계산하겠다는 말에 “어휴, 학생이 무슨 돈을 써요. 나중에 혼자 여행하는 학생 만나면 그 때 소라씨가 쏘면 되지요.” 라고 답하던 장면만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남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그 뒤로도 수많은 여행을 했지만 그 때의 빚을 갚을만한 일은 없었다. 전처럼 혼자 제주 올레길을 걷는 이도 많지 않았고, 나도 점차 차에 몸을 싣고 친구들과 혹은 남자친구와 함께 맛집이나 핫플을 찾아다니게 되면서 낯선 이를 마주할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그렇게 몇 년,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없는 나날을 보냈다. 매일 보는 사람들과 늘 같은 일을 하고 비슷한 대화를 나누며 보내던 날들. 그러다 영어회화 수업을 찾게 되었다. 매주 한 번씩 만나 함께 회화 연습을 하게 된 사람은 우리 이모뻘의 여자분이었다. 복잡한 서울이 싫어서 멀리로 이사가 왕복 다섯 시간의 출퇴근 시간을 쓰고 있고, 찬 음식을 잘 먹지 않아 냉장고를 내다버렸더니 마음이 편해졌다고 하는, 그 나이대 어른 치고는 조금 독특한 세계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20년 넘도록 해온 일이 여전히 제일 재미있다면서도 회사사람들과의 갈등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우리는 한 해가 지나는 동안 영어로, 영어가 답답할 때는 우리말을 조금 섞어가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주제는 다양했다. 일이 되기도 하고, 꿈이 되기도 하고, 여행이 되기도 했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이 멋지다고 자주 생각했고, 그는 내 얘기에 ‘나는 왜 그 나이에 일만 했을까요?’ 라고 묻는 날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업에 한참 나오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는 말을 전해왔다. 들어보니 상사와 일 하는 방식이 너무도 맞지 않아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고, 개인 작업실을 열 계획인데 그 전에 긴 여행을 떠나보기로 했단다. 그 이유가 (나에게는) 대단했다. “소라씨는 나보다 한참 어린데도 그 많은 곳을 가보고 경험해봤잖아요. 듣다보니 나도 가보고 싶다, 갈 수 있겠다 싶어졌어요.” 내 이야기를 듣다가 호기심이 생기고 용기를 내어 떠나겠다는 사람. 그는 그 자체로 나에게 감동이었다. 여태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동경하기에 바빴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나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에 나까지 마음이 설렜다. 소식을 미리 들었으면 마지막 수업에 선물이라도 준비해 갔을텐데. 여행지는 부탄으로 골랐다고 했다. 평소 성정과 잘 어울리는 독특한 여행지라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제주에서 만난 연구원님이 떠오른 건 그 때였다. 그에게 받은 호의를 다른 누군가에게 똑같은 형태로 돌려주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전달했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다. 여행을, 삶을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마음이 그녀에게로 전해진 듯한 기분이었다.

그들의 얼굴이나 그들과 함께한 시간을 또렷하게 기억한다든지, 언젠가 다시 만나 회포를 풀고 싶다든지 하는 마음은 아니다. 잠시 스치는 사이었고 아마도 그래서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일테니까. 그저 지금도 여행하며 잘 살고 있는지, 우리가 마주했던 날을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는지, 가끔은 나를 떠올리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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