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기 위해 카페에 와 있다. 온 지 시간이 좀 지났는데 도무지 화면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찌해야 하나 이리 저리로 절박하게 시선을 자꾸 옮겨본다. 자세를 고치고 앉아 한숨을 내쉬니 이내 익숙한 좌절이 귓가를 간지럽힌다. 온몸의 피부 아래 3cm 정도 지점을 쉴 새 없이 간지럽히고 있는 것도 아마 이 것인 듯싶다.
이 상태를 순간적으로 벗어나는 방법에는 몇 가지가 있다. 당장 여기를 박차고 나가거나(이렇게 집에 돌아가 더 크고 적막한 좌절을 바로 맞이하거나, 3~4군데의 카페를 연속해서 옮겨 다니다 산만함으로 뒤덮인 공허감이 더해진 더 큰 좌절을 맞이하거나), 샌드위치를 시켜 먹으며 무의미하게 넷플릭스를 보는 것으로 좀 환기를 시키거나(어설프게 흘러버린 시간을 인식하는 순간 그냥 인생이 망했다는 과장된 좌절감을 아주 생생하게 느끼거나), 아니면 이 간지러움을 참고 꾸역꾸역 화면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한 글자도 안 써지는 텅 빈 시간을 보내게 될지라도 그래도 이 편이 늘 가장 낫다.
그렇게 용기 내어 이 옵션을 택하고 여기까지 쓰고 나니 그래도 오늘을 조금 더 살아갈 자격을 부여받은 듯하다(1~2km 정도 달린 느낌이랄까, 오늘치를 달리려면 아직 멀었다).
나는 내가 용기 낼 수 있는 옵션을 좋아한다.
나는 익숙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사람, 음식, 미국 시트콤은 예외다). 익숙함이라는 것에 소란스러움, 질서 없음, 저속함, 뻔함, 과하게 대중적임 등의 요소가 더해지면 나는 그 시공간을 우주에서 없애고 싶어 진다(이건 내향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도 같다). 강남에서 일할 때, 퇴근길에 신논현 역으로 가는 먹자골목을 지날 때면 당장 지나는 차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고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첫날을 제외하고는 매번 주먹을 꼭 쥐고 빠른 걸음으로 그 길을 지났다.
대개의 사람들은 익숙함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친숙한 장소나 길, 방식을 좋아하는 것 같다. 반면 난 꽤 많은 카테고리에서 익숙해지면 지루함, 불안감, 두려움을 심하게 느끼고, 가장 멀고 낯설고 외진 곳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정된 기분을 느낀다. 어느 밤에 낯선 도시의 외진 골목을 함께 걷다 내게 이 말을 들은 엄마는 진심으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나 또한 이건 뭔가 생물학적인 어떤 이치나 원리에 맞지 않는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이 처음 일었다. 무난하게 진화했다면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멀고 낯설고 외진 곳에서는 편안함보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게 맞는 것 같은데 말이다.
만 스물, 왼 발로 아프리카 땅을 처음 밟았던 날 밤 8시 45분, 남아공 케이프타운 공항 입국장 한가운데 홀로 덩그러니 서서 느꼈던 그 강렬했던 편안함과 안정감, 그때부터 모든 게 시작된 것일까.
첫 배낭여행으로 두 달간의 아프리카, 중동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나는 마치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프리카에 꿀이라도 발라 놓고 온 사람처럼 당장에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함에 동동거렸다. 그리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산 넘고 물 건너 다시 도착한 아프리카 땅에서 생각했다. 이렇게 불편하고 불안정한 이곳에서 내 마음은 왜 이리도 편안하고 안정된 것일까(혹시 마음의 편함은 몸의 불편함과 비례하는 것인가)? 아프리카로 다시 향하기 전 돈을 벌기 위해 6개월 동안 있었던 캐나다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그곳에선 시간이 갈수록 심한 우울감에 빠져 끝이 뭉툭한(안전한) 무언가로 계속 손목 언저리를 긋던 버릇이 있었다. 새로운 곳이 익숙해질 무렵 나는 늘 감당하기 힘든 불안과 우울의 늪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에서는 그저 누워있기만 해도, 길거리의 식당에서 밥을 먹기만 해도 마음이 편했다. 한 국가에 비교적 오래 있을 수도 있었다. 어느 국가, 어느 도시에 있느냐, 어떤 목적으로 있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했지만 대개 그랬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순간 마치 자동으로 행복해질 자격을 부여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금씩 쳐질 때에도 문득문득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행복을 쉽게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아프리카가 좋았던 이유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았던 이유도 많았다. 그곳이 마냥 좋고 나와 잘 맞아서 그랬던 것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거칠고 비교적 고도화되지 않은, 되는 것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상식에서 벗어난 상황이 많지만 그렇다고 몰상식한 자들이 판을 치지도 않는, 그런 본질이 남아있음에서 오는 불편함, 예측 불가능함과 가능성들이 나는 싫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지리적 매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를 홀렸다. 반면 영화나 음악 같은 문화적인 부분들은 나와 취향이 너무 맞지 않아 난감했던 적이 많았다(나는 아프리카 곳곳에서 영상, 뮤직비디오 등을 만드는 일을 했었다). 아, 미술은 너무 매력 있었다.
아무튼 나는 아프리카보다는 구 소련과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 지역에 있던 국가들, 특히 발칸 반도, 발트해 부근의 국가들을 좋아한다. 그곳들이 확실히 내 취향과 더 맞는다. 그렇지만 나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살아있음을, 그저 살아있어도 됨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그저 내가 익숙함을 좋아하지 않고 멀고 낯설고 외진 곳을 좋아해서, 그게 나의 가장 큰 취향이기 때문일까?
나는 취향이라는 것이 많은 부분 내가 타고난 생물학적 요인들로부터 비롯된다고 생각해 왔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음악 장르, 좋아하는 영화 스타일, 성 지향성 등은 다양한 환경적, 경험적 요인들의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가장 뿌리에는 무엇에 대해 내 신경계와 호르몬이 어떻게 작동하고 반응하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취향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고 인생 전반에 적용되는 법칙일 테지만.
그러나 내가 그렇게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은 신념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누군가가 가진 신념 자체가 그 사람의 취향 전반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사람들을 만나며 종종 느껴왔고, 무엇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신념 또한 일차적으로는 생물학적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석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수도 있지만) 신념이라는 후천적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은 요소가 생물학적 요인으로부터 (주로) 비롯된 취향의 뿌리를 잠식할 수 있다는 것에 의아함과 호기심을 느끼곤 했다. 사는 동안 절대 변할 수 없는 개인의 유전적 특징(생물학적 발현과 작동의 메커니즘)이 변했을 리는 만무하니, 일차적인 요인들 위 이차, 삼차적인 내부적, 외부적 요인들의 복잡한 결합과 다양한 조화 또한 분명히 실재한다는 걸 실감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우리가 가진 신념 따위는 다 거짓이고 허상이며 오직 생물학적, 일차적인 실체와 반응만이 (우리가 모든 기억을 잃고 리셋되어 아이처럼 되어버린 상황을 가정했을 때의 정체성이) 분명히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우리가 아메바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저 생물 자체로써만의 의미라면 우린 우주라는 거대한 에너지를 이루는 (그중 생물로써의 특성을 지니고 우주 에너지의 흐름에 미세하게 기여하는) 우연한 하나의 덩어리라는 의미 외에 서로와 스스로를 위하려는데 의미 따위를 가질 수 없으며, 우리가 겪는 이 모든 것들 또한 우리를 행복하게 하려고도, 일부러 괴롭히려고도 하지 않는 그저 하나의 흐름이고 현상일 뿐이라는 것일 테다.
그러나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는 한, 우리가 모든 기억을 잃은 상황을 가정하더라도 우리의 무의식은 실재할 것이며, 뇌의 일부분이 아예 잘려나가지 않는 한 기억 또한 실재하고 있을 것이고, 우리가 후천적으로 얻거나 만들어 온 모든 것들은 유전자에 기록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 개개인, 각자라는 개체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고 반응하는 모든 체계에 생물학적 요인과 더불어 함께 영향을 미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실인 것은 그 의미는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느끼고 서로 영향을 미치며 이 순간들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그저 분명한 현상이고 사실인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정체성을 이루는 것은 생물학적 요인들에 더불어 경험이고 기억이며 지식이고 신념이고, 나아가 그 모든 것이 진심이다(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의 결합이 나를 이루며, 그 모든 것들이 지나온 과정에는 타인이 있고 사회가 있었다. 그러니 결국 나라는 개체를 이루는 것은 순도 100%의 내가 아니며, 우리는 개념적이 아니라 실재적으로, 실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글이 너무 멀리까지 떠내려온 것 같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것이다. 아프리카는 많은 면에서 내 취향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곳에서 (거의 유일하게) 깊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는 진정한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꼈다. 그 진짜인, 실재하는 느낌과 감정을 일으킨 내적, 외적인 요인은 다양할 것이다. 익숙함에서 불안을 느끼는 생물학적인 요인에 신념적(너른 세상을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면 최대한 다양한 곳을 탐험하고 경험해야 하며, 남들이 닿기 어려운 낯설고 외진 곳까지 최대한 멀리 도달해보아야 한다 / 불편과 위험을 감수하는 노력과 용기가 있을 때 나의 경험과 일이 더 가치를 띤다) 요인이 더해졌을 것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지리적 지식과 그로부터 비롯된 환상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 취향을 이루는 요소의 종류와 복잡성에는 조금씩의 차이가 있겠지만 아프리카를 좋아하는 나도, 발칸 반도를 좋아하는 나도 모두 사실인 것이다. 진심(느낌과 감정)은 그저 한 가지로 분류하여 판단해서는 안 되는 무엇이다.
사람의 정체성을 탐색해 보는 부분에 있어 취향과 신념 중에 무엇이 더 진짜인지 구분하려 하며, 어느 한쪽은 진심을 기반에 두고 있지 않다라고 나도 모르게 해석하고 싶어 했던, 그렇게 단순화해서라도 세상의 복잡함을 이해하는 체계를 마련하고 싶어 했던, 아니 사실 너무나도 절실하게 나의 진심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던, 나아가 취향이 아닌 신념을 따를 때에만 비로소 행복할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거라고 믿고 살아왔던 나에게 이 글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