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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J Dec 21. 2021

아름다운 마지막을 기대하며

<<어떤 죽음이 내게 말했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라는 질문은 너무도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질문이지만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마음에 염두해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결정하면 저절로 어떤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지가 결정되어 지는 것이 논리적일텐데, 왜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은 아직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을까?


인생의 황혼기에 계신 어르신들이 쓰신 책을 읽는 걸 좋아한다. 긴 세월 동안 그분들의 삶의 경험가운데 녹아있는 여러가 지혜와 진리를 간접 경험하는 것이 좋다. 꼭, 인생의 황혼기가 아니더라도, 삶의 깊은 경험들을 녹여낸 책들을 통해 그들의 삶을 들어다 보는 것이 좋았다.

<<어떤 죽음이 내게 말했다>>는 18년차 종양내과 전문의 김범석 교수님께서 그분의 매일의 일상에서 마주하는 암환자분들과 그분들의 보호자들을 통해 교수님 자신의 여러 시선들을 담담히 써내려간 책이다. 여러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리고 의사의 눈으로 그것을 해석해 내려갔다는 것이 매우 좋았어야 했는데, 좋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이 책은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꽁꽁 묻어둔 나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과 아쉬움과 후회와 막연함들을 끄집어내는 책이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그 질문과 아쉬움과 후회와 막연함들은, 내가 바라는 '삶'바라는 '죽음'과의 간극에서 오는 것인듯 하다. 


저자는 여러 환자들과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저자 자신의 개인적 삶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죽음과 삶을 재조명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삶이 무한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특히 '00개월' 또는 '00%'로 정의 되는 생존률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거의 매일 생각 할 수밖에 없는 암환자들은 자신의 유한한 삶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며 살아가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은 매우 각양각색이다. 

저자는 책에서 "무한히 지속될 것 같았던 생이 유한하고 소중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삶을 바라보 관점과 가치관은 분명히 변한다."라고 했지만, 모든 사람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분"이 계신가 반면, "그렇게 쓸쓸하게 떠나지는 않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남기는 분이 계셨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소위 말하는 '기적'같은 일들 가운데는 거의 모두 '사랑하는 누군가'가 등장한다. 

설명되지 않은 '임종의 지연'에 어린 두 아들이 있었고, '특별하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신 할머니의 삶 속에도 그녀를 사랑으로 살뜰히 보살핀 가족들이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나는 새삼 이들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의사의 처방이나 면역 항암제가 아니라 그 사랑 아니었을까 생각했다."라고 되뇌인다. 



나는 과연,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사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까, 아니면 '그렇게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될까?

나는 내 삶의 끝에서 어떤 일들 때문에 후회하고, 어떤 아름다운 추억으로 인해 미소 지을 수 있을까? 



아마도 이 책이 불편 했던 더 깊은 내면의 진짜 이유는, 반 강제적으로 끝내버린, '특별해 보이는' 삶에 대한 아쉬움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 아닐까?

내가 꿈꾸고 바래왔던, 소위 말하 나의 '비전'을 이룬,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특별해 보이는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나는 왜 행복하지 않지?'라는 내 깊은 내면의 질문을 애써 무시하며 살았으면서.......

왜 지금 또 다시 그 때의 삶을 그리워하며 아쉬워 할까?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사람으로 죽기를 원하지만 "화려하게 빛나는 드러나 보여지는 영향력"을 갖고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나의 내면의 모순들. 

그 간극이 메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하고 아쉬울 수밖에.....


하나님은 끊임없이, '나와 걷자' '나와 함께하자' '나와 동행하자' '나와 함께 누리자'라고 하시는데, 

값 없이 주어진 십자가 은혜가 나라는 사람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하시는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 된다고 하시는데, 나는 왜 자꾸 엉뚱한 곳에서  나의 삶의 가치를 증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할까?


너무나 다행인 것 한 가지는. 

아직도 이렇게 흔들리고, 불안하고, 후회하는 삶의 한 가운데 있지만,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내가 맞이하고 싶은 "죽음"의 간극이 조금씩 매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서 누군가를 돌보려 하기 이전에, 나를 돌보고 보살피는 연습을 하고 있고,

미래의 특별한 어느 순간을 위해 현실을 견디기고 의미 부여하기 보다는, 오늘의 소소하고 평범한 일상에 집중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내 일상을 공유하며 누리, 평범함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기쁨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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