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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il Aug 19. 2020

양귀자 '모순'

책/소설

 매일 아침 모의고사처럼 푸는 빽빽한 지문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 막히는 글 말고, 숨통 트이는 글이 읽고 싶었다. 서점에서 '모순',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르게 내 상황에서 공감되는 단어들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항상 고민하는 부분들이기도 하고. 신기하게도, 교과서에서 본 '원미동 사람들'의 저자, 양귀자 씨의 소설이었다. 교과서 삽입 내용 외에는 양귀자 씨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시험이 끝나면, 읽어야지'하고 돌아온 우리 집에 낡은 '모순' 책이 있었다. 선풍기에 머리를 말리며, 모순을 펼쳤다. 과연 어떤 '모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까.
 

 짧은 책이었고, 또 정보를 주는 글도 아니었지만 수많은 포스트잇이 필요했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음을 울렸다. 25살의 진진의 나이도, 예민함과 끝없는 고민, 생각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영화 벌새를 보는 기분 같았다. 명확한 클라이맥스나 울음을 터뜨려야 할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슬프지 않은데, 슬펐다.  
 

  열심히 소설에 이입했다. 책을 보며 우연히 알게 된, 이현우의 '헤어진 다음날'은 즐겨 듣는 노래가 되었다. 진진의 이모 집에서 비 오는 날, LP판을 켜고 혼자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 노래를 들을 때면, 진진의 이모와, 진진의 삶이 감히 그려지는 듯하다.
 

(스포일러) 일단 인물의 이름도, 마음에 들었다. 진진, 진모, 나영규, 김장우 모두 캐릭터의 성향과 찰떡이었다. 나도 진진처럼, 김장우가 좋았다. 그런데 그 두 남자가 등장했을 때부터 이상하게 진진이 결국 나영규를 택할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선택의 결과가 이 소설의 핵심은 아니지만(선택을 하게 되는 전체의 과정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궁금해서 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끝에 가면 갈수록, 김장우를 향한 사랑에 대한 확신을 느끼는 진진을 보며 안도했다.
 '기우였구나. 내가 너무 현실적으로 생각했구나.'
서툴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장우와 진진이 예뻤다.
'그래, 이게 사랑이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모의 죽음이 있었고, 아버지가 있었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었군. 나영규였어.'
 진진을 사랑하는 김장우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과, 너무 사랑해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진진의 마음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아직 서해에 가보지 않았습니다.'라는 시를 여러 상황 속에서, 나는 자주 떠올리곤 한다. 한국 주입식 교육의 힘은 무섭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가끔, 지나고 보니 그 뜻이 내게 온전히 와 닿을 때가 있다. 이번에도 이 시가 떠올랐고, 진진의 마음 같았다. 김장우는 진진에게 '서해에 있는 당신' 같은 사람일 것이다.
 
 진진의 선택도, 엄마가 아닌 이모의 죽음도, 모순적이었다. 그런데 삶 자체가 모순이기에 진진과 이모의 선택도 모순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게 아닐까. 이중부정은 긍정인 것처럼.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 아니라, '사랑'을 찾는 과정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감정과 삶과 주변인에 대한 고찰을 풀어낸 '삶'에 대한 소설이었다.

  p.s 작가의 말도 마음에 들었다.

"새삼스런 강조일 수도 있겠지만, 인간이란 누구나 각자 해석한 만큼의 생을 살아 낸다. 해석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전적 정의에 만족하지 말고 그 반대어도 함께 들여다볼 일이다. 행복의 이면에 불행이 있고, 불행의 이면에 행복이 있다. 마찬가지다. 풍요의 뒷면을 들추면 반드시 빈곤이 있고, 빈곤의 뒷면에는 우리가 찾지 못한 풍요가 숨어 있다. 하나의 표제어에 덧붙여지는 반대어는 쌍둥이로 태어난 형제의 이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엄마와 이모를 쌍둥이로 설정한 것도, 이 모든 게 작가의 자연스러운 큰 그림이었다. 일상적이거나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를 이렇게 흡입력 있게 이끌어나간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담담하게 풀어가는 문체가 좋았다. 꾸미지 않아도 진실을 담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글이었다. 양귀자 씨의 소설을 더 읽어보고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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