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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도동꿀벌 Oct 23. 2021

비건 디저트, 그 새로운 세계

종종 케이크를 사러 가는 집 근처 카페가 하나 있다. 3년 전 상도동으로 이사 온 뒤 동네 산책을 하다 발견한 이곳. 어쩐지 먹을 때마다 케이크가 야금야금 작아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빼면 재료들의 충실한 맛이 늘 만족스러운 곳이다.


 맛없는 디저트를 먹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기 때문에 낯선 가게를 들어갈 때는 꽤 신중한 편인데, 이 카페를 처음 봤을 때 실패하지 않겠다고 생각한 데에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사장님의 자부심마저 느껴지는, 가게 앞 입간판 때문이었다. “100% 동물성 생크림으로 디저트를 만듭니다.”


 생크림이면 생크림이지 동물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럼 식물성도 있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아마 당신은 디저트에 관심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다.


 동물성 크림은 우유 속 유지방으로 만든 것으로 보통 ‘생크림’이라고 하면 이 크림을 가리킨다. 식물성 크림은 팜유나 야자유 같은 식물성 기름에 첨가물을 넣어 만든다. 둘은 비슷하게 보이지만 맛이나 질감은 다르다. 식물성 크림은 혀 위에서 녹지 않고 끝 맛이 느끼하다. 반면 동물성 크림은 쉽게 녹고 가벼우며 맛도 깔끔하다. 동물성 크림이 더 비싸기 때문에 흔히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케이크는 식물성 크림을 사용한 경우가 많다. 

서울 한 비건 식당의 케이크

입에서 살살 녹던 '진짜 케이크'의 핵심


 내가 생크림에 동·식물성의 구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어느 날이었다.


 외국인 기숙사에 함께 살던 한국인 유학생 J의 방에서 여럿이 모여 케이크를 만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이었을 것이다. 당시 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친구 생일에 직접 만든 케이크를 선물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이었다. 유행이었다고 할까, 정확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당시 1300원이 넘는 엔화 환율이 안 그래도 가벼운 유학생들의 주머니 사정을 더욱 여의치 않게 했기 때문이다.


 말이 수제 케이크지 실은 ‘유사 케이크’에 가까웠다. 파이류의 과자를 3단으로 쌓아 모양을 내는 식이었다. 비교적 요리에 자신이 있는 경우에는 ‘밥통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전기밥솥으로 찐 초콜릿 시트에 초코송이 과자를 숭숭 꽂으면 끝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J의 등장은 신선한 것이었다. 나보다 한 학기 늦게 일본에 온 J는 모두가 인정하는 요리사였다. 못 하는 음식이 없었다. 된장찌개 같은 기본적인 한식은 물론이고 갈비찜처럼 고난도 요리도 레시피 없이 척척 해냈다. 게다가 한 상 떡 벌어지게 차려 사람들을 불러 먹이면서도 정작 본인은 음식에 큰 욕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쿨하기까지 했다.


 그런 J는 케이크마저 남달랐다. 변변한 도구도 없는 주방에서 딸기 쇼트케이크를 뚝딱 만드는 걸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직접 구운 쉬폰 케이크를 도마에 올린 뒤 스패츌러도 없이 도마를 빙빙 돌려가며 솜씨 좋게 아이싱을 했다. 한창 아이싱을 하던 J는 어떤 맥락에서인지 이렇게 말했다. “동물성 크림을 써야 해. 그래야 맛있거든.”


 정말 그랬다. J의 케이크 생크림은 뒷맛이 깔끔했고, 입 안에 넣자마자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빵의 텁텁한 크림과는 달랐다. 이때부터였다. 내 안에 ‘맛있는 디저트=동물성 재료’라는 등식이 자리 잡은 것은.


'비건'이라면 '살 덜 찌는 빵'인 줄 알았는데


 동물성만 고집하던 내가 비건 디저트라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 일이다. 지난해 고기를, 올해 계란과 우유 등 유제품을 차례로 끊은 직장 동료 M 언니를 따라 곳곳의 비건 식당과 카페를 찾기 시작하면서다. M 언니와는 종종 디저트 투어(?)를 함께 한 사이로,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달달한 디저트에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언니의 채식으로 더 이상 같이 투어할 수 없음에 잠시 슬퍼했지만,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비건 디저트라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게 비건 디저트는 ‘살이 덜 찌는 빵’에 지나지 않았다. 버터 같은 고칼로리 재료를 넣지 않아 다이어터의 양심을 덜 아프게 찌르는, 꿩 대신 먹는 닭이었다고 할까. 늘 어딘가 부족했다. 디저트란 대개 버터의 기름지고 풍성한 맛이 핵심인데, 버터의 풍미가 빠진 디저트는 아무래도 퍼석했다. 게다가 건강빵을 표방하며 단맛까지 줄였으니 당 중독자가 만족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불만족스러운 맛에 논비건 디저트보다 비싼 가격까지 지불해야 하니 나로서는 선택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요즘은 비건 디저트의 다채로움과 그 풍부한 맛에 매번 놀라고 있다. “버터나 계란을 넣지 않은 게 맞아? 라는 질문이 절로 나오는 디저트들을 자주 만난다.

서울 한 비건 도넛 가게의 도넛. 나의 ‘원픽’은 얼그레이(오른쪽 줄) 도넛이다.

 최근 가본 비건 디저트 집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O 도넛 가게였다. 남대문 근처 골목에 위치한 이 가게는 ‘비건을 위한 길티 플레저(약간의 죄의식을 동반하는 즐거움)’라는 슬로건 그대로 매우 ‘길티’한 맛의 도넛을 선보인다.


 사실 도넛은 내가 썩 선호하지 않는 디저트다. 도넛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도넛들, 이를테면 빵 안에 달콤한 필링을 넣고 슈가파우더를 입힌 도넛들은 ‘싫어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피하는 편이다. (앞서 소개한 팀홀튼에서도 마음에 드는 도넛 한두 가지만 1년 내내 먹었다. 시장표 ‘도나스’는 아주 좋아한다.) 그런 내가, ‘심 봤다’를 외치고 싶은 도넛을, 그것도 비건 도넛 가게에서 만난 것이다.


 진한 유기농 제주 말차 글레이즈에 말차 크럼블을 올린 말차 도넛은 씁쓸한 맛이 즐거웠다. 헤이즐넛 가나슈 초코 글레이즈 도넛은 이탈리아 P사의 초콜릿이 연상될 만큼 부드럽고 달달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 원픽은 얼그레이 도넛. 특히 도넛 위에 올라간 아몬드 크림이 고소하면서 글레이즈와 잘 어우러졌다. 동물성 재료만이 디저트를 디저트답게 만든다는 오랜 믿음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지속 가능한 디저트 생활을 위하여


 거창한 선언을 하듯 말했지만, 여전히 동물성 생크림을 좋아한다.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이왕이면 더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싶다. 삶의 낙을 단숨에 포기하긴 어렵다. 그러나 그저 다이어트용 빵일 뿐이었던 비건 디저트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점은 분명히 하고 싶다. 나의 ‘디저트 생활’이 어떤 생명이나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일 수 있음을 조금씩 인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식물성 크림이 환경 친화적인 것은 아니다. 팜유 산업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주범이다. 현지 농장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며 유지된다는 국제사회의 비판도 받는다. 크림 속 각종 화학 첨가물 때문에 건강에 해로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식물’이란 이름이 부를 오해를 막기 위해 덧붙인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다. 요즘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카페라떼를 마실 때 우유 대신 두유나 귀리 우유 등 식물성 재료를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옵션이 있는 경우에 그렇다. (아직 스타벅스 같은 대형 프랜차이즈나 비건 카페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들다.) 어렵게 넓어진 선택지가 다시 쪼그라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실은 맛도 구수하니 우유를 넣은 것보다 좋다.


 며칠 전에는 동네 비건 베이커리에서 파는 인절미 크림빵에 도전했는데 감동적인 맛이었다. 인절미 가루와 두유로 만들었다는 크림은 동물성 생크림에 절대 뒤지지 않았다. 비건 디저트는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을까? 열심히 먹어서 응원할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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