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 나들이
바라나시에서 며칠을 보내며, 일과의 패턴이 생겼다. 우선 차이를 시키고, 간단히 아침을 먹고 가트를 산책한다. 한갓지게 마실을 다녀오고 점심을 해결한 뒤 오후에는 시타르 레슨을 받고, 관광지를 다니고 저녁에는 노을을 본다. 밤에는 숙소에서 다른 여행자들과 서로의 하루를 나누기도 하고, 다음 여행지를 물색하며 마무리한다. 일상의 단순함을 만끽하는 날들이었다.
하루쯤은, 그동안 가보지 못했던 바라나시의 근교를 둘러보기로 했다. 모처럼 소질 없는 협상까지 해서 릭샤를 잡아탔다. 처음 이 도시에 들어와 혼돈, 카오스를 맛보았던 그 고돌리아 거리에서 자그마치 30~40분을 릭샤를 타고 가야 하는, 힌두 대학교가 가보고 싶었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란 말이 딱 어울렸던.
<바나라스 힌두 대학교>는 생각보다 큰 규모의 교정을 갖고 있었다. 정문에서부터 한참을 걸어 들어가 찾아본 미술대학은 무언지 모를 행사로 닫혀있었다. 과연 인도의 미술대학의 실기실과 대학의 전시장은 어떤 모습일까 무척 궁금했었는데. 대학의 전시장도 있다니! 바라나시에서 이런 공간을 마주할 수 있다니 감격했지만, 내부를 들어갈 수 없기에 실망감이 더 커졌다. 아쉬움에 혼자 탑돌이 하듯 주위를 괜히 빙빙 돌았다. 고즈넉한 캠퍼스 풍경 속의 미술대학 건물 한쪽엔 철을 주제로 하는 전시 플래카드도 크게 걸려있었다. 전시도 볼 수 없다니. 또 한 번의 실망감이 흘러갔다.
이 여행을 떠나오기 전, 우연히 <아니쉬 카푸어>의 전시를 볼 기회가 있었다. 여행을 준비하며 그가 인도 출신이라는 걸 상기하니 더 진한 울림으로 다가왔었고 그가 힌두교의 의식에서 본 안료 가루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가루 더미' 작업들이나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는 거울 조각들은 더욱 그랬다. 그가 비록 이곳에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청년기에는 영국에서 전문 미술교육을 이수하였다) 역시 자신의 뿌리와 색, 그리고 경험이 작품을 만드는 기본적인 베이스를 거스를 수는 없는 것인지. 전시 플래카드 속, 작품의 단단한 이미지 한 점에 아쉬움을 달래고, 한참을 서성이다 돌아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적 드문 캠퍼스에서 나를 흘깃거리는 현지 학생들이 하나둘 걸어오고 있었다. 빈손으로, 수확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괜히 더 피곤했다. 들어오는 길은 릭샤에 올라타 가뿐했으나, 나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빈 릭샤를 찾기도 힘들었고, 그야말로 튼실한 내 다리로 20여 분이나 걸어 의도치 않았던 캠퍼스 산책을 하게 된 셈이었다. 관악산의 그 S대처럼 학교의 정문과 캠퍼스 건물과의 거리는 멀고도 먼, 고난의 길이었다. 그래도 숙소로 돌아오는 시간 동안 시내 구경을 할 수 있었다. 마치 관광버스처럼 한참을 달려 마을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스쳐보며 돌아왔다. 각종 직업군의 사람들, 각종 개체의 동물들, 생전 처음 보는 탈 것들, 거리의 음식들. 여행자들이 몰려있는 가트 주변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진짜 인도인의 삶-그 장면은 이제야 내 눈앞에 있었다.
다시 가트. 휘적휘적 산책하다 귀여운 아가씨와 대학생 일행을 만났다. 오랜만의 한국말도 반가웠고, 홀로 다니는 여행 중이라도 간혹 이렇게 마음 맞는 일행을 만나면 들뜨기도 한다. 적극적인 학생들 덕에 의기투합하여 강가의 보트 투어와 ‘뿌자’(puja)라는 힌두식 예배를 함께 보기로 했다. 보트 투어 비용이 얼마일지, 우리끼리 한국말로 뱃삯을 궁금해하는 내용이 어떻게 들렸는지, 갑자기 주변의 왈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왈라’는 하대의 호칭으로 꾼, 놈 같은 의미. 예를 들면 나무꾼, 뱃사공 등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붙이는 호칭이다. 어리숙한 호구 관광객처럼 보였는지, 몰려든 왈라들과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되었다.
“60!”
누군가 먼저 금액을 불렀다.
“50!”
“40!!”
“...”
경매장이 따로 없었다. 서로의 마지 노선을 들키지 않도록 눈치 보며 조금씩 금액을 잘라나가기 시작한다. 우리가 조금은 멈칫하고 있는 순간, 어느 구석에서 외치는, “30!!”
그동안 눈치만 보던 삐쩍 마른 할아버지 뱃사공이 절반 가격인 30루피를 부른다. 단호한 표정도 보인다. 협상의 결과로 보면 우리 쪽이 승기를 얻은 셈인데, 이대로 힘없는 할아버지 뱃사공에게 반값 투어를 맡길 것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갑자기 그동안의 경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젊은 왈라가 소리친다. 포기했다는 듯 "30루피, OK"를 외치며 우리를 끌고 가려는 강렬한 눈빛과 손짓을 보냈다. 신나게 흥정에 이긴 기분이지만 3명분의 뱃삯으로 깎은 값을 환산해보니 기껏 600원이다. 보트에 올라 계산해보니 과자 한 봉짓값도 못 치를 돈이다. 깎는 자들에겐 마치 게임 같을 테지만 그들 왈라들에겐 한 끼 식사가 결정되는 금액일 수도 있었다. 게임처럼 기를 쓰고 즐겼나 싶어 미안해지려는 찰나, 젊은 왈라가 말했다.
“손님을 좀 더 태워야 해.”
결국, 젊은 왈라는 우리를 보트에 태운 뒤 (깎은 금액만큼 ) 손님을 더 모아 태워야 한다고 말했다. 흥정과는 별도로 그는 그 나름의 계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다른 승객을 호객하는 30여 분의 댓가를 치러야 했다. 이익을 본 만큼의 값을 지불하게 되는 것, 역시 세상엔 공짜는 없다. 깨달음을 얻으며 기다림의 시간도 좀 더 즐기기로 했다.
보통 일출, 일몰에 이루어지는 갠지스강의 보트 투어는 강가의 메인 가트에서 출발해서 북쪽의 화장터(burning ghat)를 돌아 남쪽의 화장터를 들러 다시 메인 가트로 돌아오는 코스다. 강 저편엔 어스름하게 노을이 지고 배 위에서 보는 오래된 도시의 모습은 또 새롭다. 우리와 합승한 노부부는 네팔인이었다. 그들은 이곳을 자주 찾을 뿐 아니라, 평양과 서울도 다녀봤다 했다. 보통 이상의 클래스라 짐작되는 멋쟁이 여행객이시다. 처음 만났지만 유쾌한 동행들과 더불어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왁자지껄 갠지스강을 휘젓고 들어올 무렵, 해가 거의 저물고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드는 가트의 중심. ‘다사스와 메드 가트’로 향했다.